처음 직업기자가 되고 3년여간 매해 200여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보고 글을 썼다. 눈 떠서 다시 감을 때까지 일만 하는 날들이었다.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와 맥주 한 캔 마시며 리뷰 초고를 쓸 때, 머릿속에 끙끙거리며 담아낸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나면 그 상쾌함이 무엇에 비할 바가 없었다.
세상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갑자기 회사가 사라지고, 옮긴 회사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하고, 모두 내팽개치고 섬으로 떠나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았다. 더 연봉이 많은 직업을 찾은 동료들과, 애당초 돈이 많아 미래 걱정 없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들은 섬에서 산에 갔다 바다에 갔다 하는 나에게 부럽다고 했다. 모두 거짓으로만 느껴졌다.
행복한 일을 직업으로 삼는건 위험하다. 내가 즐거울수록 생계는 어려워진다. 시간이 흘러 내가 천재가 아님을, 남보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갈수록 비참해진다. 내가 비참하지 않다고 애써 다독여도 남들이 알아서 이야기해준다.
돌아보면 그동안 비수를 참 많이 꽂았다. 오늘 연기한 배우에게 ‘이번 공연이 지금까지 본 이 작품 중 최악이라고’ 한 적 있다. 기사에 ‘그의 연기는 캐릭터와 맞지 않다’고 쓴 적 있다. 대놓고 ‘저 캐스팅은 보지 않겠다’고 제작사에 말한 적도 있다. 드라마 속 지휘자가 채송아(박은빈)를 공연에서 제외하며 “그럼 꼴찌를 하지 말든가”하는 그보다 심한 말을 내뱉으면서 기자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다. 땅을 칠 일이다.
주변도, 취재하던 업계도 그랬다. 천재이거나, 든든한 빽이 있거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거나. 그들은 쉽게 포스터에 얼굴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 인터뷰 부탁이 들어왔고, 몇 번을 거듭하면 스타가 됐다. 한번 스타가 되면 팬들이 생기고, 쓴소리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연과 앙상블의 격차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연예인이 낙하산처럼 떨어지면….
공연장과 인근에서 만나는 배우들은 더할나위 없이 긍정적이다. 때로는 생각이 없어 보일 만큼 작품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그들에게도 가끔씩은 술자리에서 채송아가 했던 “내 안에 담긴 것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작품에 대해 온갖 쓴소리를 하며 격론을 펼치다가도 술집만 나서면 달라졌다. 찬 새벽공기에 흰 담배연기를 후욱 뿜어내고 나서는 “그래도 좋아, 지금이”라고들 했다.
고등학생 시절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게 어느 선생님은 교사가 되라고 하셨다. 안정된 직업이 먼저, 좋아하는건 취미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채송아 부모님이 “5급은 아니더라도 7급은…”이라며 공무원이 되라는 말과 같았다. 그는 정말 실패한걸까. 비슷한 그 고민을 털어놨던 문학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각부터 틀려먹었는데, 너 먹고살거나 찾으라”고.
유망주 소녀와 연주 후 중년의 지휘자는 박준영(김민재)에게 “너무 모든 사람들 마음에 들게 연주하려 애쓰지 마. 콩쿠르 심사위원 전원에게서 8점 받으면 물론 1등할 수 있겠지만, 때로는 한두 명에게 10점 나머지에게 6~7점 받는 게 더 나을 수 있어. 그렇다면 그 한두 명에게 평생 잊지 못할 연주가 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겁내지 말고, 너의 마음을 따라가봐”라고 한다. 채송아도 그에게 “준영씨는 마음에 드셨냐”며 지난 연주를 떠올리게 한다.
가족의 생활비를 위해, 홀로 그리워하는 아이에 대한 연민과 부채의식으로 인해 ‘아주 잘 해야만 했던’ 그에게 이 말들은 작은 변화를 일게 한다. 그리고 채송아가 무너지지 않은 척하며 무너진 순간, 한마디 위로보다 강한 음악으로 마음에 이는 파도를 고요하게 밀어낸다.
천재는 아니나 꿈을 꾸는 그녀와 천재이나 안식처가 없는 그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삼각관계’라는 필연적 갈등을 살짝 덜어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천천히, 아주 서서히 끓어오르는 성장드라마다.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청년들이 마지막 선을 넘어가는 순간, 그 찰나를 아주 잔잔하게 곱씹게 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음악의 힘처럼, 글의 힘도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요망한 생각을 해보게 할 만큼.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