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빚쟁이 표심 노리나…빚탕감에 독촉차단도 해준다는 정부

■금융위 '소비자신용법' 추진
"빚 갚기 힘들다" 탕감요청 가능
'빚 독촉' 연락도 주 7회로 제한
과잉 추심땐 되레 법정손해배상
"시장 왜곡…모럴해저드 초래" 우려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9차 개인연체채권 관리체계 개선 태스크포스(TF)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원회

앞으로 빚을 갚기 어려운 개인채무자가 금융회사에 빚을 깎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게 된다. 채무자가 특정시간대·특정방법으로 빚 독촉 연락을 받지 않도록 추심업자에게 요청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금융당국은 채무자가 빚을 갚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지원함으로써 금융사와 채무자가 상생할 수 있다는 취지라지만 정작 금융권에서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가 크다. 시장논리가 아닌 정치논리로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부담을 금융사가 온전히 떠안게 됐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에서는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이 또 남발됐다는 비판이 거세다.

금융위원회는 9일 이 같은 내용의 소비자신용법안을 발표했다. 소비자신용법안은 기존 대부업법을 대체하고 대출 전 과정에서 개인과 금융기관 간의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마련됐다.

법안의 핵심은 개인채무자의 채무조정요청권 도입이다. 개인채무자가 스스로 빚을 갚기 어렵다고 판단한 경우 채권금융기관에 채무조정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채권기관은 바로 추심을 중지하고 채무자의 소득·재산현황 등을 바탕으로 10영업일 내 채무조정안을 제시해야 한다.

개인채무자의 연체 및 추심 부담도 완화된다. 채권금융사가 개인 연체채권에 대한 기한이익상실(대출금을 만기 전에 회수하는 것)할 경우 상환기일이 오지 않은 채무원금에 연체 가산이자를 부과할 수 없다.

추심업자가 채무자에게 빚독촉을 위해 연락하는 것도 일주일에 7회로 제한된다. 채무자가 특정시간대, 특정방법과 수단으로 추심 연락을 하지 않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내용의 소비자신용법을 추심업자가 위반할 경우 추심업자뿐 아니라 원채권을 보유했던 금융사도 함께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금융당국은 채무자가 과도한 빚에 억눌려 잠적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채무조정으로 재기를 도와 금융사·채무자가 윈윈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금융사들은 이 같은 법안이 도입되면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않을 것이라며 심각한 모럴해저드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도를 악용하는 채무자가 분명히 발생할 것”이라며 “정부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다 보니 금융사는 당연한 권리인 연체 채권 회수가 어려워지는 등 시장 기능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고 토로했다.

"이러면 누가 빚갚나" 불신커져 대출심사 엄격해질듯


손병두(오른쪽)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9차 개인연체채권 관리체계 개선 태스크포스(TF)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원회

“앞으로 금융사들이 신규 대출을 더 까다롭게 볼 거예요. 그럼 그 피해는 신용등급이 낮은 서민에게 돌아갈 겁니다.”

9일 금융당국이 발표한 소비자신용법 제정을 두고 시중은행·저축은행·카드사 등 전 금융권이 일제히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소비자신용법은 개인채무자와 채권금융기관 간 사적 채무조정을 활성화하고 개인채무자의 과도한 추심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골자다. 금융사들은 금융당국이 소비자 보호에 치중한 법안을 마련하면서 시장원칙을 훼손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신용등급이 낮은 서민이 주로 이용하는 저축은행·카드사 등 2금융권에서 신규 대출을 줄이면서 서민이 제도권 금융에서 불법 사금융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실하게 빚 갚는 사람만 ‘바보’되나=소비자신용법이 시행되면 개인채무자는 금융기관에 채무조정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채무자가 금융기관에 소득·재산상황 등 빚 상환의 어려움을 입증할 자료를 내면 채권기관은 10영업일 이내 채무조정안을 마련해 채무자에게 제안해야 한다. 채무자와 금융기관 간 채무조정이 활성화되도록 금융사는 미리 채무자의 상환능력과 채무 특성에 따른 감면율, 상환 일정 등 내부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법 적용 대상은 개인 채권으로 10억원 이하 실거주 주택담보대출, 5억원 미만 무담보대출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기관과 채무자 간 사적 채무조정을 활성화하기 위해 채무조정교섭업도 도입된다. 채무자를 대신해 채무조정 요청서를 작성하고 제출해주는 업무를 맡는 회사가 신설되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채무자가 빚을 아예 안 갚고 버티기보다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재기에 성공함으로써 금융사에도 이익이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당장 부실 가능성이 높은 차주에 대해 신규 대출이 더 까다로워질 것으로 본다. 가령 기존에는 턱걸이로 신용등급 6등급을 받은 개인에게 저축은행·카드사 등에서 대출을 해줬다면 이제는 채무조정 가능성 등을 고려해 대출이 거절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채무조정은 도덕적해이를 부추기는 것”이라며 “금융사도 손실 예상치를 고려해 그 비용을 이자로 전가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약자 위한 정책"이라지만…저신용 서민들 불법 사금융으로 밀어내는꼴


◇추심업자의 잘못도 금융사 책임=금융권은 무조건 채무조정에 응해야 하는 것 외에 추심업자의 불법행위까지 공동책임을 지는 점도 문제라는 입장이다. 법안에 따르면 원채권금융기관은 금융사 대신 빚 독촉을 위탁받은 추심업자뿐 아니라 금융사로부터 연체 채권을 사들인 추심업자까지 모두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점검해야 한다. 법 위반 시 추심업자뿐만 아니라 개인 채권을 처음으로 양도한 채권금융사까지 함께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사전에 금융사가 추심업자를 선정할 때도 법 위반 내역, 채무자 보호 기준, 민원 현황 등을 평가하도록 규정했다.

저축은행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연체 채권을 추심업자에게 매각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며 “이대로 제도가 시행되면 연체율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중소형 추심회사들이 문을 닫아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기존에는 부실채권을 매각할 때 높은 가격을 써내는 회사에 넘겼는데 앞으로는 공동 손해배상책임 가능성을 고려해 금융기관이 계열사 내 추심회사 등 몇몇 대형 회사에만 연체채권을 매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융기관이 자체 추심을 하기 위한 여건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법안에서 추심업자는 채무자에게 최대 일주일 7회까지만 빚 독촉을 촉구하고 한번 연락한 뒤 7일간 다시 채무자에게 연락할 수 없게 했다. 채무자가 특정 시간대, 특정 방법·수단으로 추심 연락을 하지 않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가령 채무자가 월요일 오전9시부터 11시까지 연락제한을 요청하면 추심업자는 다른 요일, 다른 시간에 연락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이달 중 설명회 등을 거쳐 내년 1·4분기 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김지영·김현진기자 jikim@sedaily.com

/세종=빈난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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