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너희들 손끝에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걸 알고는 있는거냐”는 울분 섞인 꾸짖음을 홀로 남은 새벽 술자리에서 중견배우에게 들었다.
글로만 봤지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라 정신이 멀쩡해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자극’이 핵심인 기사를 작성하거나 제목을 편집할 때마다 잠시 손을 멈추게 한다.
10일 방송된 MBC ‘다큐플렉스-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를 본 뒤 최근 몇 년간 설리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했다. 기억하던 것보다 많은 기사 제목에 논란, 노출, 섹시 등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방송 직후 인터넷에는 다양한 이야기와 논란이 이슈로 떠올랐으나, 내 자신이 기사를 쓰고 편집하며 악플 만큼이나 큰 상처를 줬을 수도 있음에 그저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사진을 올렸을 뿐인데 기자들이 항상 지켜보면서 기사를 올린거에요. 이게 댓글 클릭수 장사가 되잖아요. 포털이 항상 메인에 건거에요. 언제나 SNS 사생활이 날마다 감시당하고 온 국민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듯한…”이라는 하재근 평론가의 말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모두 맞는 말이다.
설리는 제 나이 때의 다른 연예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예쁘고, 상큼하고,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한국 최고의 매니지먼트가 뒤를 받치고 있었고, 자신이 속한 걸그룹은 정상에 서기도 했다. 이제 연기자로서 자신의 캐릭터를 찾고, 몇 작품만 흥행시키면 톱스타 반열에 설 참이었다.
방송에서는 어머니와 여러 연예 관계자의 이야기를 빌어 설리의 변화가 연애로부터 시작됐음을 유추하게 만들었다. 13살이 많은 최자와의 연애로 인해 어머니와 멀어지게 됐고, 또래의 삶을 뛰어 넘었으며, 그로 인해 죽음까지 이르렀던 악플이 시작됐다고. 설리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설리의 연애로부터 불거진 불편함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짚었다.
일부 공감한다. 그러나 설리의 연애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 그 언급은 무리수에 가까웠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의 말은 왜곡될 여지가 다분하다. 담당 PD는 언론 인터뷰에서 “조심하며 만들었고 내부 시사를 하면서도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느냐 의견도 구했다. 그분 역시 비난받을 일이 없다”며 최자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론 악플 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지만….
방송에도 나왔듯이 설리는 “어렸을 때부터 저를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고 했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유명세를 탄 아역배우들이 비슷한 고통을 겪는 것과 같았다. 어깨에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무섭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해야 하는. “저랑은 그 옷이 안 맞았던 것 같고. 진짜 힘들다고 해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말은 그의 너무나도 짧았던 인생의 ‘핵심 문장’이었다.
설리 친구들의 말처럼 그는 박힌 틀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듯 싶다. JTBC2 ‘악플의 밤’ MC 소개부터 ‘악플계 핵인싸, 악플도 락(樂)플로 만들어버리는’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시기 SNS를 보며 사람들이 그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할 때 뭐가 불안함을 느꼈다. 라이브 방송에서 실제 악플이 올라오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는 무섭기도 했다. 그땐 ‘연예인이니까, 베테랑이니까’ 하고 넘겼다.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악플보다 무서운게 무플’이라는 연예계에서도 악플은 독이라는걸, 하도 봐서 무덤덤했다.
‘악플의 밤’ 홈페이지 내 MC소개 캡처
당당한게 아니라 내 자신을 좀 봐달라는 것 아니었을까. 항상 예쁘고 깜찍해야 하는 연예인으로 포장돼 살아왔던 삶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들었다. 조금만 벗어나려면 자극적인 기사와 인신공격성 악플이 따라붙어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옴싹달싹 할 수 없는 방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식이 SNS였을 터였다.
설리는 “중학생때 지금 제 나이의 언니들을 보면서 정말 어른 같다고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지금 그 나이가 되어있네요. 저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라고 했다. 지금이라면 정말 많은 이들이 ‘그래 넌 충분히 그런 사람이야’라고 답해줬을 텐데 너무 늦어버린 뒤에 속으로나마 가슴을 친다.
티파니의 “모두가 다 그냥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라는 말이 쓰다. 너무 많이.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