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 중구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서 열린 ‘2020 조사활동보고회’에서 탁경국 상임위원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참석자는 왼쪽부터 이호 위원, 탁경국 상임위원, 오병두 위원. /연합뉴스
군이 허술한 수사로 타살 가능성이 있는 병사를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으로 몰고, ‘자폭 사망’으로 서둘러 결론 낸 사실이 31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14일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2020 조사활동보고회’ 보고서에 따르면 1989년 사망한 유모 상병은 당시 헌병대(현 군사경찰) 수사 기록에 ‘총기 난사 후 수류탄 자폭 사망’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헌병대는 ‘당시 유 상병이 동료 부대원 2명과 함께 분대장에게 항의하던 중 총을 난사해 분대장과 동료 1명이 사망했고, 이후 유 상병이 생존한 부대원 A씨와 총기 2정, 수류탄 3발을 훔쳐 함께 달아났다’고 기록했다. 이후 두 사람 간 다툼이 생기자 유 상병이 A씨에게 수류탄을 던진 뒤 자신도 자폭했다는 것이다. 당시 살아남은 건 동료 부대원 A씨가 유일했다.
위원회는 30년 만에 이 사건에 대한 진정을 받아 재조사한 결과 유 상병은 총기 난사 후 자폭한 것이 아닌 타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유 상병 사망 후 유족에게 시신을 공개하지 않고 서둘러 매장한 점 등을 근거로 당시 헌병 수사에 축소나 은폐, 부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조사 결과 당시 헌병대가 유 상병의 총이 아닌 생존한 A씨의 총만 발사됐다는 총기감정 결과를 수사에서 누락한 사실을 확인했다. 과학적인 수사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를 배제한 것이다.
숨진 유 상병의 최초 검안서는 ‘타살’로 기재됐다가 ‘자살’로 수정됐으며, 수류탄으로 자폭했다는 유 상병의 시신에서 총상이 있다는 진술도 있었다고 진정인은 주장해왔다.
위원회는 “객관적 사실을 은폐하여 망인을 동료 병사를 살해하고 자해 사망한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망인과 그 가족에게 큰 상처를 줬다”며 “위원회 조사결과 망인 죽음의 의혹을 제기하며 당시 군 수사의 문제점 등을 밝힘으로써 망인과 그 가족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이날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시행 계기 출범 2년째를 맞아 개최한 조사 활동 보고회에서 유 상병의 사례처럼 군 수사의 축소, 은폐 조작으로 사인이 바뀌거나 순직을 인정받지 못한 사례, 군 복무 관련 스트레스로 자해 사망한 주요 사례를 발표했다.
1948년 11월 30일부터 2018년 9월 13일 사이 발생한 군 사망사건 가운데 유족 등이 진상규명을 해달라고 신청한 1,610건 중 조사가 종결된 450건 중 일부다.
450건 중 조사 결과 군의 당시 조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223건에 대해서는 국방부, 경찰청, 법무부 등에 순직 재심사, 제도개선, 사망보상금 지급을 통한 구제 요청을 권고했다. 나머지 227건은 각하·취하 결정됐다.
위원회는 접수된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사전조사 및 본 조사를 진행 중이지만, 특별법상 출범한 위원회의 활동 기한이 내년 9월까지여서 조사 기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위원회 관계자는 “법 개정을 통해 충분한 조사 활동이 보장될 수 있도록 국회와 협의 중”이라며 조사 기간 연장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