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조민석의 설계로 마곡지구 내 조성된 코오롱그룹의 미술관 ‘스페이스K_서울’이 16일 공식 개관한다. /사진제공=코오롱
10년, 아니 20년을 준비했다. 그간 지역 문화나눔의 일환으로 과천 본사를 비롯해 광주·대구·서울 등지에서 예술 후원을 해 온 코오롱(002020)그룹이 서울 마곡산업단지 안에 마련한 미술관 ‘스페이스K_서울’이 16일 공식 개막한다.코오롱그룹이 예술을 후원하고 이를 공유하는 메세나 활동을 실천한 것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천 사옥에서 지역민을 위해 클래식·뮤지컬· 마술쇼 등을 공연하는 ‘코오롱 분수문화마당’을 약 10년간 진행했다. 이후 2009년 과천타워 로비에서 개최한 이벤트성 전시가 의외로 큰 호응을 얻은 것이 미술관 건립의 씨앗이 됐다. 2011년 과천 본사 로비에 개관한 ‘스페이스 K’는 시민들이 미술 작품을 무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울 강남의 코오롱모터스를 비롯해 광주, 대구, 대전 등지에도 마련됐다. 유휴공간을 활용한 ‘셋방살이’였지만 총 152회 전시로 437명의 작가를 후원했고, 매년 2만여 명이 관람하는 지역 명소가 됐다. 동시에 소리없이 준비한 것이 바로 ‘스페이스K_서울’이다.
코오롱그룹은 이웅열 명예회장의 부친인 이동찬(1922~2014) 선대 회장이 지난 1995년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이후 그림에만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을 정도로 예술향유의 가풍을 지녔다. 오너가족 중에는 미술전공자도 있으나 스페이스K운영 등 메세나활동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 건립한 ‘스페이스K_서울’은 마곡지구 문화공원 2호에 연 면적 약 600평(2,044㎡) 규모로 조성됐다. 건축·설계는 2014년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소장이 맡았다. 부드러운 곡선과 호가 어우러진 기하학적 건물이 주변의 녹지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코오롱그룹이 예술나눔을 위해 건립한 미술관 ‘스페이스K_서울’의 개관전 전경. /사진제공=코오롱
미술관으로 향하는 공원에서부터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한경우 작가가 증강현실(AR)로 구현한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둥들(Umimaginable columns)’이다. 맨눈으로는 그저 공원인 이 곳에 모바일기기를 갖다 대면 5m 높이의 기둥들이 나타난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기둥,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만 보이는 기둥이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 그 실체는 미술관 옥상의 특정 지점에서 AR앱을 구동해야 확인할 수 있는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과 예술적 사고로 다다를 수 있는 사물의 이면을 생각하게 한다.글렌 브라운 ‘여인Ⅱ’ /사진제공=코오롱
안드레 부처 ‘무제(방랑자)’ /사진제공=코오롱
1층 전시장에서는 개관 특별전 ‘일그러진 초상’이 내년 1월29일까지 열린다. 초상화가 가장 전통적인 미술장르였다면, 현대미술가들은 일그러진 초상을 통해 자기 자신은 물론 사회를 직시하고 그 부조리까지 들춰낸다. 영국 yBa의 초기 작가 중 한 명인 글렌 브라운은 렘브란트·벨라스케스·피카소 같은 대가들의 유명 작품을 이리저리 변형시켜 물감을 덕지덕지 쌓은 독특한 입체로 바꿔놓았다. 고대 원시회화처럼 보이는 독일화가 안드레 부처의 작품이 그 유명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 영감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실소가 터질지도 모른다. 유럽 역사의 폭력성에 주목하는 루마니아 화가 아드리안 게니, 베트남의 성차별을 지적하는 베트남계 미국작가 딘큐레 등은 세계적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만나기 힘든 작가들이라 더 반갑다. 국제무대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예술가 중 한 명이자 ‘집 시리즈’로 유명한 서도호의 1996년작 ‘고등학교 교복’은 교복문화와 군사문화가 뒤섞인 1970년대의 집단적 통제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 밖에도 줄리안 슈나벨·길버트 앤 조지·지티시 칼랏·장샤오강 등 세계적 거장들이 총출동해 ‘미술관다운 미술관’의 시작을 보여준다.2층 전시장에서는 회화·설치·미디어 분야를 비롯해 연극·극작가 등 각자 영역이 확고한 5명의 예술인들이 협업해 ‘우주로 간 카우보이’라는 공동 작품을 영상으로 선보인다. 교류하고 협력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미술관의 고민과 의지를 함축했다.
미술관 측은 내년 상반기 미국 마이애미 출신의 화가 헤르난 바스, 하반기엔 영국 개념미술 작가 라이언 갠더 등 굵직한 전시를 예정하고 있다. 한 미술평론가는 “기업미술관의 흥망성쇠 와중에 새로이 출발하는 코오롱 미술관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면서 “서울 서남권의 미술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데 이를 보완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