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입김에 나라곳간 '바닥'…"재정준칙, 법으로 강제해야"

[국가재정을 지키자]
⑨있으나 마나한 재정준칙
4차례 추경에 나랏빚 급증에도
"재정 경직" 여권 추가확대 압박
기준 없다보니 지출속도 가팔라
선거철 선심성 돈풀기도 불보듯
"확장기조 방어해줄 구속력 절실"


‘재정 브레이크’라고 불리는 재정준칙 발표를 앞두고 우려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재정준칙이 선언적인 의미에 그칠 것이라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부터 “재정준칙이 차일피일 늦춰지면 문재인 정부에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재정준칙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재정 씀씀이가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정치권의 입김에 재정이 좌우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박기백 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재정준칙은 일정 정도 법으로 강제될 필요성이 있다”며 “특히 외국인투자가 등 한국 정부의 부채 급증을 우려하는 이들에게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줘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서라도 실효적인 준칙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코로나19 관련 4차 추가경정예산 등으로 정부 부채가 급증하며 구속력 있는 재정준칙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올 들어 네 차례 추경으로 정부 총지출은 554조7,000억원으로 늘었다. 재정수지 적자비율은 0.4%포인트 늘어난 6.1%, 국가채무비율 또한 0.4%포인트 늘어나 43.9%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확산세가 내년에도 지속될 경우 이 같은 재정 확대 추이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정 확장 기조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재정준칙 마련이 시급한 이유다.


15일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이달 재정준칙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재정준칙이 어느 정도 법적 구속력을 가진 형태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최근 여당을 중심으로 한 확장적 재정정책 압박에 ‘고무줄 준칙’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전 국민 기본소득 도입은 물론 최근 ‘기본대출’ 도입 필요성까지 제기하며 정부 재정 확대를 압박하고 있다.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재정운용의 경직성을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아예 대놓고 “기재부가 추진 중인 재정준칙 안을 철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박홍근 의원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이 시점에서 재정준칙을 만들면 불필요한 논란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논리를 근거로 정치권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대비 우리나라의 국가채무비율이 낮다는 이유로 재정 지출의 추가 확대를 주문하기도 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준칙의 실효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단 준칙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며 “이미 내년 예산까지 짜여진 상황이지만 재정준칙을 통해 가팔라지는 재정지출 속도를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야권의 ‘경제통’ 의원들 또한 지금과 같은 재정 지출 확대를 통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희숙 국민의힘 경제혁신위원장은 재정수입과 지출의 균형관리를 골자로 한 국가재정법을 발의하며 “문재인 정부는 미래세대에 빚을 떠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없다”며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재정 지출을 당장 관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재정 확장 기조를 방어해줄 재정준칙이 보다 구속력 있는 법적 근거 하에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코로나19와 같은 긴급 상황에 재정확장 정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이드라인이 없다 보니 지출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오는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 일정까지 감안하면 정부의 선심성 재정 풀기는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부채 증가 추이가 한층 가팔라질 수 있는 셈이다. 또 선진국 입장에서는 영향이 크지 않은 ‘인구구조 고령화, 복지지출 증가 추세, 통일’ 등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재정운영 기조를 보다 보수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재 재정 적자의 수준도 중요하지만 재정 적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이를 제어할 준칙이 필요하다”며 “지금과 같은 재정지출 속도라면 향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늦어진 재정준칙 도입이 문재인 정부의 재정지출에는 손도 대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달 중 재정준칙을 법제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발표된다 해도 40일간의 입법예고와 규제개혁, 법제처 체계 심사,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면 12월이나 돼야 국회로 법안이 넘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내년 중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재정준칙이 처음 적용되는 것은 2022년 예산 편성부터다. 그 해 5월에는 대선이 있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는 재정준칙을 지킬 필요가 없는 셈이다.

재정준칙 속 ‘유연성’도 논란이다. 기재부는 경기 대응성이 높은 재정준칙을 만들고 있다. 총지출 증가율을 ‘직전 3개 연도 평균 지출 증가율+5%포인트’로 제한하는 식이다. 재정적자 관리 목표도 매년 지키도록 하기보다 ‘3년 연속 목표치를 밑돌면 안 된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경제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둘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재정준칙은 있으나 마나 한 기준이 된다. 또 의무보다는 권고 수준에 그칠 수도 있다. 책임소재가 불분명한데다 재정준칙의 적용기간을 5년으로 한다면 재정준칙의 준수 여부를 5년 후에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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