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파리대왕' 초판 출간

1954년 인간 잔혹성 담아내

1954년 출간된 파리대왕 초판의 표지. 권당 12실링 6데니였던 초판 중 상태가 좋은 책은 경매가 3만 달러를 호가한다.

1954년 9월 17일, 소설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초판이 서점에 깔렸다. 저자 윌리엄 골딩(당시 43세)은 첫 작품인 이 소설로 1983년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출간 66년이 지나도록 평가는 찬양 일색이다. 비평가와 일반독자, 교사와 도서관 사서 등 어떤 직업군에서나 명저로 손꼽히지만 출간 전후 사정은 전혀 달랐다. 고교교사이던 저자의 초교 완성 시점이 1951년. 주요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으나 7개 출판사가 퇴짜를 놨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대형 출판사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제목과 내용을 고치자는 조건이 달렸다. 무명의 골딩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목부터 ‘Strangers from Within(우리 안의 이방인)’에서 ‘파리 대왕’으로 바꿨다. 작가의 자존심을 접고 ‘시장(출판사)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막상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해가 가도록 판매 부수가 3,000부에 머물렀다. 기대를 접을 무렵 반전이 일어났다.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영어권에서만 누적 2,50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골딩이 주목한 주제는 애초 제목과 비슷하다. 불안한 세상과 인간 내부의 잔혹성. 핵전쟁의 위협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지던 5~12세 영국 소년들이 태평양의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리더를 뽑고 구난 봉화를 올리는 등 이성적으로 행동하던 소년들의 일부가 근거 없는 두려움과 사냥을 통한 육식 욕구에 이끌려 무력을 중시하는 야만 파벌로 변해간다. 광기에 휩쓸린 소년들은 연달아 살인까지 저지른다. 소설은 어른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끝을 맺는다.

친구를 잡아 죽이려 놓은 불에 섬 전체가 타오르고, 연기를 본 영국 순양함의 장교가 등장하며 목숨을 건진 소년은 눈물을 터트린다. 그를 쫓던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혹자는 이 소설을 ‘15소년 표류기’의 디스토피아판이라고 하지만 실제 모델은 로버트 밸런타인의 ‘산호섬(1858)’. 주인공들의 이름도 산호섬에서 따왔다. 19세기의 산호섬 뿐 아니라 18세기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진무구의 세계’처럼 이전 시대 영국 작가들은 인간 본성의 순수함과 문명에 대한 찬양을 읊었다.

20세기의 골딩은 이들과 반대로 인간의 악한 속성 때문에 파괴되어가는 세상을 소설에 담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학교부터 사회까지 온통 정글이다. 안팎의 반성 능력도 사라졌다. 위기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어른과 같은 좌표와 기준마저 갈수록 희미해질 뿐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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