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 ‘애사’에 실린 에밀 바야르의 삽화 ‘코제트’
새파란 청춘을 19년 징역으로 날렸다. 빵 하나 훔친 죗값이었다. 그사이 누이와 일곱 명의 어린 조카들은 틀림없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감옥을 나와서도 싸늘한 눈초리와 모진 발길질에 시달리며 평생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빅토르 위고 원작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이야기다. 가난과 도둑질의 대명사가 된 장 발장. 비천한 전과자 주제에 장 발장은 새로운 삶을 꿈꿨다. 보잘것없는 지방도시를 부흥시켜 시장으로 추대됐고 시민혁명에 휩쓸렸다가 명문 귀족과 사돈을 맺기도 했다.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장 발장 곁에는 일생을 걸고 지켜야 할 코제트가 있었으며 코제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베르에게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민태원
장 발장의 운명은 ‘애사’, 슬픈 역사라는 뜻의 제목으로 번역됐다. 힘없지만 아름다운 영혼이 견뎌야 했던 한 세상이 딱 두 글자에 담겼다. 훗날 ‘청춘예찬’이라는 수필로 명성을 얻은 민태원의 데뷔작이자 인기작이 바로 ‘애사’다.
흥미롭게도 ‘애사’에서 장 발장의 이름은 아직 장 발장이 아니었다. 민태원은 장 발장에게 장팔찬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줬다. 코제트는 고설도, 자베르는 차보열로 교묘하게 바뀌었으니 원래 발음에 가까우면서도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근사한 이름들을 얻은 셈이다. 그렇더라도 ‘애사’는 분명 프랑스를 무대로 삼았으며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부터 파리의 공화주의 혁명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를 그려냈다. 장 발장 이야기라면 빼놓을 수 없는 미리엘 주교도 본명대로 등장한다.
ABC계
더 흥미롭게도 민태원의 ‘애사’는 우리가 처음 만난 ‘레미제라블’이 아니다. 원작의 한 대목이 일찌감치 ‘역사소설 ABC계’로 소개된 바 있다. ABC계는 공화파 청년들의 비밀결사 아베세(ABC)의 벗, 미천한 자들의 친구라는 의미다. 이틀간의 파리 봉기와 치열한 시가전 끝에 장엄한 최후를 맞이한 열혈 혁명가들의 모습만 따로 떼어내 옮긴 것이다.
이 명장면은 장 발장이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순간이자 ‘레미제라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소설 ABC계’에는 장 발장이 등장하지 않으며 코제트도 자베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로되 엄연한 역사소설이 탄생했다.
‘너 참 불쌍타(1914)’
또 있다. 이번에는 ‘너 참 불쌍타’라는 절묘한 제목을 달고 방대한 원작의 줄거리가 요약됐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말은 비참한 사람들을 뜻하니 ‘너 참 불쌍타’야말로 원제를 아주 그럴싸하게 살려냈다. 장 발장도 불쌍하거니와 매춘부의 사생아 코제트도 불쌍하고 감옥에서 태어나 센강에 몸을 던진 자베르도 불쌍하지 않은가. 하나같이 끔찍하게 참혹한 인생 아닌가.
그러고 나서야 민태원의 ‘애사’가 제대로 번역됐다. 왜 하필 ‘레미제라블’이고 어째서 또 장 발장이란 말인가.
‘역사소설 ABC계’는 1910년 7월에 번역됐다. 고작 한 달 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총독부가 들어섰다. 침략자를 코앞에 두고 버젓이 바리케이드 항전이라니, 정부군 총탄에 스러지는 민중의 벗이라니, 얼마나 무모하고도 멋진가. ‘역사소설 ABC계’는 자주국에서 토해낸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너 참 불쌍타’는 1914년 10월에 번역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참이고 일본은 산둥반도로 진격해 칭다오를 집어삼켰다. 전시 식민지 백성들은 수많은 자베르들에 의해 노예로 길들여졌다. 법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한 헌병처럼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마저 자베르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었다.
민태원의 ‘애사’가 신문 연재를 마친 날은 1919년 2월8일. 장팔찬은 미리엘 주교의 은촛대 한 쌍만 고설도에게 남기고 천사들의 나라로 향한다. 우연일까. 바로 그날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식민지의 피맺힌 역사가 만세 함성으로 뒤덮이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민태원의 신문 연재를 홍난파가 엮은 ‘애사(1922년)’
홍난파가 단행본으로 엮은 ‘장발장의 설움(1923)’
3월1일의 기억이 사그라들 무렵에는 ‘애사’와 ‘장 발장의 설움’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다시 번역되기도 했다. 그렇게 오욕의 역사 고비마다 어김없이, 그리고 서로 다른 자태로 낮은 자들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번역은 이방인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마법의 거울이며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그러므로 번역은 늘 우리 자신의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겠지만 ‘레 미제라블’이 한국인의 핏줄에 뜨겁게 흐르지 않은 적이 없다. 몇 년 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국에서 개봉된 날 마침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는 신랄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또 한 번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진영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