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지난 2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트램에 치여 숨진 한국 유학생 사건과 관련해 현지 검찰이 피해자 과실에 따른 단순 사고로 수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하자 유족 측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총영사관이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유학 중이던 여대생 A(21)씨는 지난 2월 10일 자정 무렵 이탈리아 밀라노 시내에서 철길을 건너다 트램(노면전차)에 치여 숨졌다.
사고는 A씨가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등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 직후 발생했다. 트램 정거장의 철길을 건너던 A씨가 턱에 걸려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려던 순간 정거장에서 막 출발한 트램이 A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진행했다. 해당 트램은 밀라노시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작년 9월 영국 대학에 새로 입학한 A씨는 방학 시즌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를 여행하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이탈리아로 온 유족은 오열했고, 사고 장면을 목격한 친구들도 큰 충격을 받아 병원 치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밀라노 검찰은 곧바로 트램 기관사 과실 여부를 포함한 사고 원인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5개월간 진행된 수사의 결론은 피해자 과실이었다. 피해자가 술을 마신 상태에서 갑자기 철길을 건넜고 트램 기관사가 운전석에서 넘어진 피해자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현지 검찰은 이런 사정을 들어 ‘기관사가 예상하기 어려운 사고’였다며 피해자 과실에 따른 단순 사고로 규정, 지난 7월 30일 법원에 수사 종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유족 측은 명백한 부실 수사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통유리로 된 운전석 앞 시야가 넓게 트여 있어 기관사가 전방 주의 의무만 제대로 지켰다면 피해자의 존재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다. 실제 트램 기관실 내 CCTV 영상에는 피해자가 철길을 건너는 순간부터 넘어졌다가 일어나려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유족 측은 이 CCTV가 기관사 눈높이와 같은 위치에 설치돼 있다고 했다.
이를 토대로 피해자가 넘어진 뒤부터 트램이 출발하기까지 약 5초 사이에 기관사 시선이 다른 데 가 있었던 게 아닌지 유족 측은 의심한다. 피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검찰 측 주장도 목격자의 진술을 반영한 것일 뿐이며 CCTV상 A씨가 철길을 건널 당시 흔들림이 없었고 실제 부검에서도 그런 정황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유족 측 변호인은 최근 이러한 수사상 결점을 적시한 재수사 요청서를 법원 담당 재판부에 보냈다.
유족들은 밀라노 경찰이 사고 발생 직후 자살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하는 등 초동 수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됐다면서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사고 이후 밀라노 검찰의 수사 진행 과정에서 유족이 밀라노총영사관의 영사 조력을 제대로 받았는지도 의문이다. 유족 측은 “총영사관에서 영사관측 고문 변호사를 소개해주고 법적 조치와 관련한 안내 설명을 한 뒤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고 말했고, 변호인의 경우 “총영사관측에서 가끔 전화를 해 사건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고만 했다.
사실상 사고 후 8개월 가까이 유족과 직접 소통이 없었을뿐더러 사건 수사 관련 정보조차 유족 변호인에 의존했다는 얘기다. 밀라노총영사관은 지금까지 수사의 핵심 물증인 CCTV 영상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사고 원인을 밀라노 검찰과 마찬가지로 피해자 과실로 자체 결론내리고 영사 또는 외교적 노력을 방기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총영사관 측은 “현지에서 수사가 진행될 때는 불편부당하게 수사해 달라는 말을 하는 것 외에 우리 쪽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했다.
유족이 재수사 요청서를 현지 법원에 송부한 데 대해 현지 법률 전문가인 변호인은 “과거 사례를 볼 때 법원이 이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재수사 가능성에 무게를 둔 반면 총영사관은 “재수사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이탈리아에서 한국 교민 또는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일은 흔치 않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4년 전인 2016년 5월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 인근 한 호텔에서 당시 40대 여성이 추락사한 일이 거론된다.
/김기혁기자 coldmeta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