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위의 북한 김정은. /연합뉴스
북한이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유례 없이 심야 시간대에 진행했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재난 관련 주민들과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할 땐 “미안하고 고맙다”며 울먹이다 남측을 향해서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며 “보건 위기가 극복돼 손을 마주 잡는 날이 찾아오길 기원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반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등장할 때는 당당한 미소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자애로운 지도자이자 민족을 사랑하는 지도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유일 지도 체제는 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결사 옹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10일 열병식에 참석한 김여정(붉은 원). /연합뉴스
조선중앙TV는 10일 수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2시간16분 분량의 열병식 영상을 방영했다. 실제 열병식은 이날 자정부터 개최됐지만 영상은 19시간이 지난 이날 오후 7시 공개한 것이다.
불꽃놀이, 발광다이오드(LED)가 장착된 전투기 등 어둠 속에서 빛을 활용한 볼거리로 연출한 이번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시계탑의 시침과 분침이 ‘10일 0시’를 가리키는 순간 극적으로 등장했다.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연상시키는 회색 정장과 넥타이 차림의 나온 김정은은 어린이들이 안겨준 꽃다발을 현송월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게 넘겼다. 김정은의 양옆에는 북한 핵과 미사일 개발 분야의 핵심인사인 리병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포병 전문가인 박정천 군 총참모장이 섰다. 이들은 최근 군사 분야의 업적을 바탕으로 고속 승진한 인사들이다.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도 포착됐으나 그의 부인인 리설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설하는 김정은. /연합뉴스
김정은은 이날 연설에서 “적대 세력들의 지속적으로 가중되는 핵 위협을 포괄하는 모든 위험한 시도들과 위협적 행동들을 억제하고 통제 관리하기 위해 자위적 정당 방위수단으로서의 전쟁억제력을 계속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우리의 전쟁억제력이 결코 남용되거나 절대로 선제적으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안전을 다쳐놓는다면 우리를 겨냥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든다면 나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공격적인 힘을 선제적으로 총동원하여 응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며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 전쟁억제력 키우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우리 스스로를 지키자고 키우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핵 개발 등 북한의 군사력 증강이 자위적인 목적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김정은의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북한군. 이날 열병식에는 코로나19 확진자 ‘0명’을 과시하듯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연합뉴스
김정은은 대북제재 장기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수해로 인해 힘들었던 한 해를 짚으며 주민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지도자로는 이례적으로 울먹이는 모습도 연출했다.
김정은은 “연초부터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이 예상치 않았던 엄청난 도전과 장애로 참으로 힘겨웠다”며 “가혹하고 장기적인 제재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한 속에서도 비상 방역도 해야 하고 자연재해도 복구해야 하는 난관에 직면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올해 들어와 얼마나 많은 분이 혹독한 환경을 인내하며 분투해왔느냐”며 목이 멘 목소리로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방역 전선과 자연재해 복구 전선에서 우리 인민군 장병이 발휘한 애국적 헌신은 감사의 눈물 없이 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너무도 미안하고 영광의 밤에 (재난 복구에 투입된) 장병들과 함께 있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 확진자가 1명도 없다는 사실도 강조하며 “고맙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우리 국민들을 향해서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내며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굳건하게 손 맞잡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 대선을 목전에 앞둔 것을 염두에 둔 듯 미국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을 피했다.
북한이 10일 공개한 신형 ICBM. 기존 ‘화성-15형’보다 미사일 길이가 길어지고 직경도 굵어졌다. /연합뉴스
열병식은 이후 전략무기 공개로 이어졌다. 북한은 초대형 방사포와 대구경 조종 방사포,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4형’ 등 그동안 준비했던 전술·전략무기를 모두 선보였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열병식 마지막 순서에 공개됐다. 김정은은 단상에서 이를 내려다보며 간부들과 마주 보고 웃었고,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기도 했다. 이날 열병식에서는 김정은을 포함해 누구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내년 1월 8차 당 대회를 앞두고 80일 전투가 한창인 가운데 대내 결속을 최대 목적으로 한 연설로 보인다”며 “(한국 관련 연설 내용은)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보다는 매우 긍정적이나 구체적인 대남 시책은 없는 원론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전쟁억제력을 확보했음을 재차 강조하면서 이미 과거형으로 성취한 목표로 설명했다”며 “대미 메시지는 일절 없는 것으로 보아 엄중한 현 상황에 대한 인민들의 이해를 다지는 대내용 성격이 매우 강하다”고 덧붙였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