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4월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의 아내 아키에 여사가 한 사학재단의 국유지 헐값 매입 의혹에 연루됐다는 ‘아키에 스캔들’로 떠들썩했다. 당시 아베 총리는 국회에서 “아내의 관여가 밝혀지면 총리직을 사퇴하겠다”고 공언했다. 얼마 후 국유지 매각을 담당한 재무성 공무원이 관련 문서의 일부를 삭제한 데 이어 이 사실이 드러나자 목숨을 끊는 사태가 발생했다. 관가에서는 “자살 공무원의 상사가 손타쿠 식으로 공문서 변조에 앞장섰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손타쿠(忖度·촌탁)는 윗사람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 하는 행동을 말한다. 일본인들이라면 평소 체득하고 있는 처세법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모든 일본인들이 손타쿠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이 말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詩經)에 있는 ‘타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내가 헤아린다(他人有心 予忖度之)’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일본에는 자신으로 인해 조직과 사회의 불안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다른 사람과 의견이 달라도 잘 얘기하지 않는다. 일본 지식층은 이런 문화가 평소에는 남을 배려하는 장점이 되지만 위기 때는 대처 능력을 떨어뜨리는 단점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도호쿠 앞바다에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매뉴얼에 얽매이다 피해를 키운 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이런 문화 탓이라는 것이다.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도 “바른말을 하지 않으면 일본은 망하고 말 것”이라며 손타쿠 문화에 독설을 퍼부었다.
일본 정부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장례식 때 국립대학에 조기 게양과 묵념으로 조의를 표하라고 요구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지난해 11월 사망한 후 정부는 올해 3월 정부·자민당 합동장(葬)을 치를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이달 17일로 연기했다. 교육 현장에서는 “도대체 어느 시대냐” “손타쿠 풍조를 확산시킬 것”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손타쿠는 일본에서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도 권력 비리 수사들이 지지부진한 것을 보면 한일 간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오현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