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청 요직을 두루 거친 임태희 국립 한경대 총장이 19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보수나 진보나 각각 무엇을 왜 지키고 바꾸려고 하는지 명료한 답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보수나 진보나 각각 무엇을 왜 지키고 바꾸려고 하는지 명료한 답이 없습니다.”
3선 의원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64) 국립 한경대 총장은 19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정치·행정·공공·교육 부문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시대적 요구”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이날 인터뷰는 오는 2022년 3월 치러지는 대선을 1년5개월가량 앞두고 당정청 요직을 두루 거친 그의 경험을 듣기 위해 마련했다. 그는 정치개혁과 함께 빅뱅 규제개혁, 노사관계 악순환의 고리 끊기, 교육의 자율성 확대, 정치권과 정부의 조정력 발휘 등을 주문했다.
-총장 취임 이후 3년여 동안 대학에서 어떤 혁신을 했는가.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한경대는 도내 유일한 4년제 일반 국립대다. ‘길을 만드는 대학’을 캐치프레이즈로 걸었는데 4개 단과대 간 벽이 정부부처의 벽보다 더 높았다. 단과대를 해체해 유사한 학문을 모은 융복합학부를 만들었다. 생명공학과 농업, 디자인과 건축 등을 융합했고 복수전공을 유도했다. 공기·물·흙의 환경안전 연구, 건강한 노화 연구, 인공지능(AI) 스마트농업을 강조했다. 산학연 협력을 통한 지역혁신 플랫폼도 추진했다.
-평택에 있는 한국복지대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두 대학의 학생 수가 너무 적어 통합을 추진했다. 중장기적으로 경인교대와 합치는 것도 구상하고 있다. 처음에 일부 안성 주민과 시민단체에서 ‘궁극적으로 대학을 평택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제는 오해가 많이 풀렸다. 양교 구성원의 통합 결의를 마치고 교육부에 공식적으로 신청하려고 한다. 유사한 프로그램이 많은 두 대학이 합쳐지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대학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야 하는데.
△대학들이 그렇게 교육, 연구, 인재 양성을 하는지 의문이다. 학생들이 취업 스펙을 많이 쌓는데 막상 취업하면 기업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 교육부가 창업도 많이 지원하지만 학생들은 실패할 경우 주홍글씨가 두려워 주저한다. 그럼에도 대학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대학이 교육부 평가에서 점수 깎이는 것을 무서워하는데 이런 풍토를 시급히 고쳐야 한다. 대학은 입학생만 확보하면 절실한 게 없다. 대학을 평가할 때도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으로 가르치는지 보지 않는다. 대학이 새 길을 만들고 도전하도록 교육부가 권장해야 한다.
-교육과정 혁신이 그렇게 어려운가.
△대학이 혁신적이고 창의성 있게 교육과정을 바꾸려고 해도 쉽지 않다. 일정 학생이 수강하지 않는 과목을 개설하면 대학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아 재정지원이 감소할 수 있다. 국립대 총장 단톡방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기회를 극대화하기보다는 위기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간다. 13년째 등록금이 동결돼 대학은 정부지원에 의존하는 천수답 경영을 한다. 대학에 등록금을 정상화하고 새로운 것을 찾게 자유를 주되 안 되는 곳은 도태되도록 해야 한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평가한다면.
△경제 체질과 구조의 문제 등으로 역대급 위기라고 본다. 지난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 때는 공공 부문(정치와 행정)과 민간이 공동으로 해결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중국이나 베트남은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 협공을 취하는데 우리는 기업이 안팎으로 두들겨 맞는 고립무원 형국으로 가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가 민간에 대해 훼방을 놓지 않고 도와줘야 한다. 세금 내는 사람들이 분노하는 현상이 계속되면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어렵다.
-경제 체질 개선과 노동시장 혁신이 주요 과제로 꼽히는데.
△정부가 민간 자율을 보장하고 빅뱅식의 대폭적 규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시장의 공정한 수호자가 돼야 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낼 때 노사정회의를 하는데 노조 대표들은 ‘사용자가 태도를 바꿀 수 있게 정부가 눌러달라’고 주문하고 사용자는 ‘노조를 좀 막아달라’고 하더라. 이러면 악순환의 고리가 안 풀린다. 정부가 노사 간 균형점을 잡아줘야 한다. 풀어나갈 방법이 있는데, (1938년부터 노사 자율협상 관행을 확립하고 지난해에는 고용 안정과 유연성을 동시에 추구하기로 한) 스웨덴 방식이 좋은 사례다. 정부와 정치권이 공공선 측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중심을 잡고 조정력과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양쪽 주장을 다 듣고 중용 입장에서 정책을 펴야 한다.
-상생 구호가 난무하지만 실제로는 잘 이행되지 않는데.
△하청·협력사 근로자 임금이 대기업 근로자 임금의 70% 이상 되도록 하는 등 임금격차를 줄여 제로섬 방식으로 가지 않도록 합의해야 한다. 일종의 사회연대임금제를 도입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크지 않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과 하청업체 근로자의 임금 상승 그래프를 보면 반대로 가는 경우가 꽤 있다. 더 많은 공동이익을 위해 더 크게 만들어 나눠야 한다. 대기업이 수많은 하청업체를 사정없이 쥐어짜도록 놓아둬서는 안 된다. 대기업 노조도 하청·협력업체 근로자의 희생을 방치하면 안 된다. 제가 장관을 지낼 때 의지를 갖고 건강한 노사관계 모델 도입을 조금 시도하다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추진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노총 등과 어느 정도 대화할 수 있으므로 잘 해줬으면 한다.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있다면.
△지금은 기업이 일자리 창출을 꺼리고 정부만 하는 형국인데 큰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할 자리가 없어 너무 미안하다. 당정청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서 굉장히 부끄럽고 책임감을 느낀다. 청년층에는 민간 일자리, 노장년층에는 공공 부문 일거리를 줘야 한다. 환경 개선이나 데이터 축적, 농업이나 교육 분야의 일거리를 일자리로 연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정부의 세금 주도 일자리 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구시대적 지표관리 행정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역할은 뭐라고 보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공공의 이익과 선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법원·언론·종교·지식인 등 주요 보루의 기능이 굉장히 약해지고 마비됐다. 기본이 바로 서야 사람들이 믿고 발전하게 된다. 꼭 이 정부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고 유능한 사람이 합당한 대우를 받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대기업의 경우 오너에 대한 충성도 중심으로 움직인다. 공직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사회문화가 그렇다.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중요한 것 아닌가.
△IMF 사태를 겪으며 민간 역량이 공공 부문보다 획기적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보기술(IT) 관련 정책 등이 민간 발전을 가속화했다. 지난번 촛불시위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이제는 정치·행정·공공·교육 부문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시대적 요구다. 정치인들이 공적 책임감을 느낀다면 정치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
-보수나 진보나 시대적 역할이 미흡하다.
△보수와 진보 세력이 명료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당당히 답할 수 있고 실행 프로그램도 준비해야 한다. 그냥 집권하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 삶 속에서 중요했던 것들,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는데 국민 관점에서는 틀린 얘기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도 부끄럽고 책임을 느낀다. 정당도 국고보조금을 많이 받는데 당 싱크탱크의 주기능이 선거 기획과 당 지도부 보좌에 그치고 있어서 문제다. 당 싱크탱크가 국민을 위해 정책활동을 하는 게 뭐 있나. 정당 국고보조금을 폐지하고 지지자 후원금으로 운영하도록 해야 정체성이 분명해져 정책 경쟁이 강화될 것이다.
-당정청의 리더십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정은 매우 복잡해서 아마추어로는 감당할 수 없다. 현 수준의 입법과 행정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다. 분야별로 역량을 갖추고 준비한 전문집단이 주도하게 해야 한다. 경제정책은 기본원리를 벗어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금융·조세 등 경제정책 수단은 이런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행정력에 의존하는 정책은 지속될 수 없다.
-현 정부가 재정을 과도하게 쓴다는 주장이 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역대급 위기상황에서 재정 역할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정책 효과와 지속 가능성이다. 돈에만 의존하는 쉬운 정책, 진통제식 처방은 자칫 포퓰리즘의 덫에 빠질 위험이 있다. 국민 부담을 줄이면서 효과를 더 낼 수 있는 빅뱅식 규제개혁 등의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북한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데.
△고용노동부 장관이 되기 전에 정부 대표로서 싱가포르에서 북측과 협상한 경험이 있다. 당시 여러 이유로 진전되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북미관계에서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남북문제는 주변국들의 협조를 얻어야 해결할 수 있다. 일본과 관계가 좋으면 미국과의 외교가 쉬워진다. 그래야 남북관계도 잘 풀리고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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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경기 성남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을 시작했다. 2000년에 재무부 과장을 그만두고 정치에 입문해 3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과 정책위의장 등을 맡았다. 이명박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뒤 서울대 경영학부에서 강의했다. 이어 당적을 정리한 뒤 한국정책재단 이사장을 거쳐 2017년 10월 국립 한경대 총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