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한지의 우수성과 사양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얼마 전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 보존복원 연구소는 한국의 한지를 문화재 복원 용지로 공식 인증했다.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상황으로 우리의 한지를 주문하고 있다. 한지의 우수성. 세계무대에서도 인정받고 있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한지는 우리 전통문화의 꽃이기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술은 물론 제지술의 뒷받침으로 가능했다.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인 불국사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라든가, 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책인 ‘직지심경(1377)’ 등의 기록문화는 양질의 종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기야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나 조선왕조의 ‘조선왕조실록’은 종이문화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서양으로 종이라는 존재를 알린 인물은 고구려 후예인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었다. 그는 중국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8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는 국제 교류의 중심 도시였다. 탈라스 전투의 성과로 이슬람은 제지 기술을 얻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처음으로 종이공장을 세운 것은 12세기 초였다. 종이는 실크로드 동서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동북아시아 제지술은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런 전통이 있었기에 우리의 가옥은 창호지 문화를 창출했다.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민 창호지는 종이문화의 대중화였다. 하지만 근래 종이 전통은 사라지고 있다. 환경의 변화가 종이 전통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은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다. 통도사는 불보(佛寶)사찰로 한국 불교의 상징적 존재다. 이 총림의 최고 어른인 방장 성파 스님은 전통 미술재료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왔다. 16만 도자 대장경을 비롯해 천연염색, 사경(寫經), 불화 제작, 그리고 옻칠작업 등 다방면에서 발군의 역량을 보여줬다. 스님은 최근 엄청난 모험을 단행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종이 생산에 도전한 것이다. 폭 3m에 길이 24m의 한지를 만들었다. 엄청난 크기의 한지 4장을 이어 옻칠 불화를 제작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닥나무 껍질을 이용한 종이뜨기는 한마디로 가시밭길과 다름없다. 오죽하면 손이 100번 간다 하여 백지(百紙)라고 부를까. 새로운 도전, 스님은 폭 3m, 길이 100m에 달하는 상상 불허의 한지 제작에 성공했다. 도전은 아름답다.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은 아름답다. 길이 100m의 종이 한 장. 일반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업을 사찰의 수행승께서 이룩했다는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지의 우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문제는 전통한지를 만들 줄 아는 장인의 숫자가 바닥 수준이라는 점이다. 사양길의 한지 산업. 하기야 미술계에서조차 우리의 한지를 푸대접하고 있으니 누가 한지의 전통을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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