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71> ‘항미원조’ 명분으로 패권확장 나섰지만…한국민 희생에 가로막혀

■中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

지난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 등 수뇌부가 총출동한 채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이 진행중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3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수뇌부들이 총출동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한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중국의 정식명칭은 ‘中國人民志願軍 抗美援朝 出國 作戰 70周年 大會’)’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이 이날 기념식 연설을 통해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제국주의 침략’이라고 비난한 반면 자국의 참전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규정한 데 대해 미국·한국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중 갈등상황에서 중국의 패권확장 정책이 이전 한국전쟁 시기와 오버랩 되면서 경계심이 높아졌다. 70년전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공산주의 중국의 팽창을 막았던 한국이 지금 다시 비슷한 경로에 서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날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사에서 시진핑 주석이 40여분 읽은 연설문은 이른바 ‘항미원조’를 미국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하며 결사항전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항미원조 전쟁에서 미국을 이겼으니 최근 미중 갈등도 이길 수 있다는 논리다.

즉 연설은 합법적 유엔 결의 아래에서 한국을 돕기 위한 미국의 참전과 북진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소련의 후원을 받은 중국 공산군(중공군)의 지원은 “정의로운 거병”으로, 한국전쟁 자체는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지 상관하지 말자는 “조선내전”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외교 당국의 항의에도 여전히 중국은 ‘마이웨이’다.

공산당 산하의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은 25일 한발 더 나아가 북한의 남침 자체도 부정하는 논리를 내놓았다. 공청단은 공식 웨이보(중국의 카카오톡) 계정에서 문답 형식을 통해 ‘조선전쟁은 조선이 한국을 침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니다”라고 단정하며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서로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결국 이는 한 국가의 내전”이라고 말했다.

덩달아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27일 서울서 열린 ‘한중일 평화포럼’에서 “시 주석이 70년 기념 대회에서 (발언한) 취지는 국제 정의를 수호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새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여러분들께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시면 대단히 고맙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전쟁은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공청단의 웨이보. /웨이보 캡처

전문가들은 우선 이러한 중국의 일방적인 해석에 대해 공산주의 북한과 공산주의 중국의 역사의식 공유에서 나왔다고 지적했다. 중국 공산당이 당시 정통정부인 중화민국에 맞서 이른바 ‘해방전쟁’을 진행했고 결국 중국 땅을 차지했기 때문이 북한 공산당(노동당)이 일으킨 전쟁도 역시 해방전쟁이고 정당하다는 논리다.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 미국이 끼어들어 국민당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끼어드는 것도 ‘침략’으로 본 것이다.

다만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반대한 중국 공산당 역시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 이는 한국전쟁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중공군의 현대화와 중국 자체의 경제성장을 위해 기술과 장비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를 제공해줄 소련의 북한 원조 요구를 마오쩌둥이 거절하지 못했다는 것이 주요한 한국전쟁 참전 이유로 본다. 3년 가까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공군도 기존의 게릴라식 모습에서 탈피했다. 소련과 중국은 윈윈이었다는 것이다.

연설을 읽으면 중국에게 전쟁 시기의 막대한 한국민의 피해는 안중에도 없다. 피해는 북한인들만 입었다는 논리다. 한국인들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취급한다. 만약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북한은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을 테고 남북한 국민의 피해도 모두 막았을 테다.

이와 관련, 중국의 한국전쟁 개념화도 주의깊게 봐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핵심 개념은 ‘항미원조(抗美援朝)’와 ‘지원군(志願軍)’이다. 항미원조를 보통 붙여서 이야기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항미’와 ‘원조’ 두 가지로 나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항미’가 ‘원조’보다 먼저다. 즉 중국의 관념상으로 한국전쟁은 중국이 전세계 차원에서 미국과 충돌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1950년 당시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대만의 흡수통합이었는데 이를 미국이 막고 있었다. 중국은 인도차이나에서도 미국 세력이 침투하며 남쪽으로부터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최근 관영매체를 통해 집중적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이 조선반도와 대만, 인도차이나(베트남)에서 신생 중국을 포위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정말 한반도에 재상륙하자 직접적인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중국으로 봐서는 한국전쟁 개입이 미중 대립 과정에서 하나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공산주의자끼리 중국 공산당이 북한 공산당을 도와야 한다는 심리적 유대도 있었다. 국공내전에서 북한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해준 데 대한 보답도 있었다. 최소한 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공세적 자세도 빼놓을 수 없다. 만약 중국이 한반도를 장악했으면 이후 대만과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과 함께 미국은 서태평양에서 상당 부분 후퇴해야 했을 것이다. 즉 한국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막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세력 확장계획이 수십년동안 지체됐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당초 중국은 미국과의 전쟁상태 돌입에 대해 우려했다. 참전했으면서 전쟁을 우려했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이런 사고는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23일 베이징에서 열린 행사의 이름은 ‘항미원조 출국 작전’ 기념식이다. 전쟁이라는 말이 없다. 시 주석이 읽은 연설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그렇게 명시적이지는 않다. 이는 중국이 미국의 중국 본토 공격을 두려워한 이유에서다. 중국은 일단 전투지역을 한반도로 국한시키려 했고 미국도 이에 응했다.

이와 함께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 미국과의 전쟁 필요성을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일전쟁에서 중국(중화민국)을 도와준 고마운 나라다. 국공내전에 개입해 중국인에게 적접적인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 미국과 싸우러 가야 하나’는 것이 당시 중국 민초들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중국이 그래서 고심 끝에 내놓은 것이 ‘지원군’이라는 이름이다. 중공군의 공식명칭인 ‘인민해방군’이라는 이름은 배제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도와준다는 의미의 ‘支援’이라는 한자 대신에 일부러 다소 어려운 ‘志願’이라는 말을 선택했다. 이는 스스로 뜻이 있어 원한 ‘지원’이라는 말이 된다. 자국민들의 자발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중국어로는 ‘쯔위안’이라는 발음은 같지만 성조가 다르다. ‘쯔위안쥔(志願軍)’이라고 발음할 때는 다른 느낌으로 들린다.

지난 19일 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에서 열린 ‘항미원조 7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참전군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진핑 주석이 지난 23일 40여분간 읽어내려간 연설을 보자. 연설은 중국이 미국에 대항해서 과거에 투쟁했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대부분 주관적인 의지를 표현한 것인데 이 중에서 핵심으로 한국전쟁 전개과정을 설명한 부분이 아래와 같다. 적지 않은 역사적 왜곡이 있다.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이야기한 부분의 전문을 싣고 이에 대해 세계 역사학계의 주류 주장으로 팩트체크를 했다. 연설은 중국의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 의견으로 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 (중략) 1950년 6월25일 조선내전(朝鮮內戰)이 발발했다. 미국 정부는 세계 전략과 냉전적 사고로부터 출발해 조선내전에 대한 무장간섭을 결정하고 아울러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침입했다. 1950년 10월 초 미군은 중국정부의 거듭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거리낌 없이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중조(中朝) 국경으로 끌어들였다. 조선을 침략한 미국 항공기들은 수차례 중국 동북 국경지역을 폭격하면서 인민의 생명과 재산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고 우리나라 안보에도 엄중한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급박하고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조선 당과 정부의 요청에 응해 중국 당과 정부는 비범한 기백과 담대한 지략으로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역사적인 정책결정을 내렸다. 1950년 10월19일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은 펑더화이 사령관 겸 정치위원의 지휘로 조선전장으로 투입됐다. 이는 정의로운 병사들이 정의로운 거병을 한 것이다

항미원조 전쟁은 교전쌍방의 역량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던 조건 아래 진행된 현대전쟁이었다. 당시 중미 양국의 국력 차이는 거대했다. 이렇게 극도로 비대칭적인,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 군민과 긴밀한 협력으로 양수동 서전, 운산성 격전, 청천강 회전, 장진호 격전 등 연속으로 5차의 전역을 진행했다. 이후에는 또 철통 같은 종심방어 진지를 구축한 후 여러 차례의 진공 전역을 실시하고 교살전 분쇄, 세균전 저지, 상감령 혈전 등 위무웅장한 전쟁위업을 달성했다. 전국의 각 민족 인민은 지원군 장병들을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며 충심으로 칭송했다. 지극히 어렵고 힘든 전투를 겪으며 중조 군대는 중무장한 상대를 패퇴시키고 미군의 불패 신화를 깨트렸으며 안하무인한 침략자로 하여금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게끔 만들었다. (중략) ”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 거주하는 한 참전군인이 ‘항미원조 7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 취재진에게 참전기념 메달을 보여주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번 연설에는 많은 부분에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언급에 지속적으로 미국 언론들이 팩트체크를 하는데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도 마찬가지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이 연설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또 다른 전쟁 당사자였던 한미 양국의 항의를 받은 역사왜곡이 ‘조선내전 발발’ 문장이다. 중국은 아무런 사전설명 없이 조선(한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전쟁 책임을 회피했다. 북한이 6월 25일 기습남침을 시작해 비극적인 3년여 전쟁의 원인을 만든 것은 부인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은 앞서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당시 중공군에 소속돼 있던 조선족 3개 사단, 약 6만명을 북한에 넘겨줬는데 이들은 이후 남침의 핵심이었다. 김일성은 남침 직전인 1950년 5월 베이징을 직접 방문에 마오쩌둥의 사전승인과 중공군 지원 약속을 받았다. 김일성의 진짜 뒷배인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독촉을 받은 마오쩌둥은 “(일단 남침은 김일성이 알아서 하는 대신)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돕겠다”고 말했다.

미국 제7함대의 대만해협 진입은 이 글 전개에서 다소 엉뚱하게 보일 수 있는데 사실 당시 마오쩌둥 등 중국 수뇌부의 최고 관심사는 대만이었다. 즉 대만과의 통일이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중반까지도 각지에 여전히 남아 있던 중화민국 군대와 전투중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작전으로 1951년 대만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남침에 놀란 미국이 중국의 대만 침공을 우려해 함대로 대만해협 가로막은 것이다. 대만 침공이 어려워지자 마오쩌둥은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바다로 격리된 대만에 대한 침공에 앞서 먼저 미국과 육지에서 싸우기로 한 것이 한국전쟁 개입인 셈이다.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었기 때문에 자위 차원에서 한국전쟁 개입을 했다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앞서 “미군이 참전하면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앞서 김일성에서 보장한 바 있다. 물론 중국 공산당의 종주국인 소련이 중공군의 지원을 강요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중국은 미군의 38선 돌파를 참전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이후 1951년 1월 유엔의 경고를 무시하고 거꾸로 38선을 넘어 서울을 침공했다.

미국 항공기가 중국 국경지역을 수차례 폭격한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8월27일 압록강 변의 중국 도시 단둥(당시의 안둥)을 폭격해 10여명을 사망케 한 사건이다. 중국은 이를 선전도구로 삼아 한국전쟁 개입을 정당화했다. 중공군의 압록강 도강 이후에도 수차례 중국 국경 안에 미국 항공기의 폭격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전쟁확대를 우려해 자국 항공기의 중국 영토 접근을 금지했지만 한반도 지형에 어두운 미군 조종사들은 압록강을 청천강으로 오인하고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물론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행한 불법행위가 더 컸다.

중공군의 5차례 전역(대공세)은 10월19일 참전에서 이듬해 6월까지의 전투를 말한다. 제1차 공세는 10월25일 평안북도 운산군 온정리 양수동에서 한국군 6사단과 겨룬 데서 시작된다. 중국은 이 첫 전투 승리를 기념해 이날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정했다. 한국으로서는 치욕의 날이다. 운산성 전투는 평안북도 운산군·영변군 일대에서 11월 초 중공군이 미 1기병사단 등과 싸운 전투다. 청천강 전투, 장진호 전투는 11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2차 공세 기간의 전투다.

이 연설 5차례 공세를 말하고 있지만 실제 예를 든 전투는 1~2차 공세에서 중국이 우세를 점한 것뿐이다. 중공군의 3차 공세에서 서울이 다시 함락(1951년 1·4후퇴)되지만 4차 공세가 37도선에서 실패한 후 연합군이 다시 북진했고 5차 공세마저 6월에 실패한 이후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양측은 소모전을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진지전으로 돌입한 후 미국 폭격기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는데 이것이 중국 입장에서의 교살전(후방 보급선 파괴 전투) 분쇄다. 상감령 전투는 한국에서 저격능선전투라고 불리는 싸움을 말한다. 이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군이 세균전을 폈다는 주장이다. 중국은 미국이 1951년 초 북중 국경 지대에서 세균전을 시도했다고 발표했는데 미국은 이를 부인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중립국 조사단을 파견하지는 제안도 했지만 중국이 이에 반대했다. 최근 기밀해제된 소련측 문건들도 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는데 이번 연설에서 재론됐다.

중국이 정전협정의 지연 책임을 미국에 지우는데 이것도 사실은 아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 시작 이후 실제 정전협정 서명까지 2년여가 걸렸는데 이의 책임여부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다. 휴전선 책정문제, 포로 송환문제 등 여러 이슈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힘을 한반도에서 소모하게 만들려는 스탈린이 휴전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이런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협상이 급진전돼 결국 정전협정이 맺어지게 됐다.

올해 ‘항미원조 70주년’을 맞아 개봉한 애국주의 영화 ‘금강천’의 포스터가 지난 22일 중국 베이징 시내에 걸려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실패라는 지적도 강하다. 중국으로는 동맹인 북한 정권을 붕괴에서 구해준 것이 유일한 성공일 뿐 전반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첫째 중국의 당초 목적인 대만 통합이 무위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중국은 대만의 ‘해방’을 목표로 동남부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등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만약 이때 중국이 대만침공에 나섰다면 이길 확률이 컸다. 대만으로 도피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미군은 멀리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미중이 격돌하면서 미군이 대만의 방위도 떠맡게 됐고 이에 따라 중국이 대만을 전격전으로 차지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후 대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아시아 각국들의 중국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중국은 당초 혁명을 수출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한국전쟁 개입으로 이는 공염불임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참전 이유로 북한 방어만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곧 38선을 넘어 당시 한반도 전체 점령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1951년 2월의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전투 등 37도선에서 한국과 연합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막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세력권에 들어갔을 테다. 이는 현재 미중 간의 갈등요소인 대만과 남중국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됐을 듯하다. 같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베트남은 반중국 노선을 취하고 있고 좌파 성향의 인도도 중국과 대립 중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비록 중국이 한국전쟁을 통해 국제전 경험을 쌓고 소련 무기로 무장했다고는 하지만 이후의 전쟁에서 패전하거나 적어도 승리하지는 못했다. 이는 1958년 중국·대만 간의 진먼다오(금문도) 포격전, 1962년 전후의 중국·인도 국경분쟁, 1969년 중국·소련 영토분쟁,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등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서울을 점령한 것이 적어도 지금까지 중국군이 자신의 국경에서 가장 멀리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국내적으로는 한국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시동원체제가 이후 급속한 사회주의 집단화·국유화를 추구하는 명분이 됐고 이는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의 참극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중국내 대학에 근무하는 한 한국 역사학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완전한 승리를 차지했다면 이후 패권을 강화하면서 세계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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