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는 SK D&D의 공유주거 ‘에피소드 성수 101’을 통해 합리적 생산시스템을 고려한 공간디자인 방식을 제안했다. 벽과 옷장 등 필수 가구의 뼈대를 기본값으로 설치하고 거주자가 원하는대로 이케아 선반이나 수납함 등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이케아 해킹’이다.
‘에피소드 성수 101’의 큐레이팅 룸. 개방감을 높인 오픈형 화장실(세면대 분리형)을 설치해 의도적으로 오른쪽 시야를 확보했다.
디자이너 최중호는 제품디자인과 공간디자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밥솥, 가습기, 헤어드라이어 같은 생활가전을 넘어 최근엔 공유주거, 아파트 커뮤니티시설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디자인 기준은 ‘쓸모’다. 디자이너로서 한정된 자원을 더 쓸모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의미 없는 장식적 요소를 지양하고 제품 본연의 기능과 사용성에 집중하는 것. 최중호는 제품의 필수요소와 구조 자체를 디자인 라인으로 완성시키는 데 주력한다. 이는 클라이언트인 기업의 생산라인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 제조방식으로는 표현이 어렵거나 금형 제작 등으로 비용이 과도하게 추가되어야만 한다면, 의뢰한 기업에는 ‘쓸모없는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출시된다 해도 개발비용이 늘어난 만큼 고가일 수 밖에 없고 결국 대부분의 사용자에게도 ‘쓸모없는 디자인’이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대량생산’을 염두에 둔 최중호의 디자인 방식이 주거공간에도 그대로 묻어난다는 사실이다. 취향은 지키고 싶지만 내 입맛대로 인테리어를 할 수 없는 공유주택 세입자들을 위해 벽 선반, 붙박이장 등을 합리적인 가격의 ‘이케아’ 제품과 연계시킨 것. 벽면 패널은 기본값, 여기에 수납형이든 진열대든 원하는 대로 이케아 제품을 꽂기만 하면 된다. 기존 제품을 활용함으로써 비용은 줄이고, 똑같은 인테리어를 거부하는 거주자의 만족도는 높였다. 그는 “공간디자인도 구조가 중요하다. 상황이 변하면 공간도 바뀔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상황의 가변성을 고려해야만 ‘쓸모있는 공간’이라는 해석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취향을 고려한 모듈 디자인 플랫폼을 공유주거에 접목시킨 SK D&D의 ‘에피소드 성수 101’은 그렇게 탄생했다.
최중호의 ‘쓸모있는 디자인’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바로 ‘소비’다. 그는 “호텔에 많이 묵어본 사람들은 ‘좋은 호텔’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다. 디자이너는 그 기준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그걸 비틀고 다듬어 다른 걸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자이너에게 돈 쓰는 경험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강조했다. 고급 호텔에 묵어본 적 없는 디자이너가 제대로 된 호텔 디자인을 내놓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소비 경험’만이 디자인 향유층을 온전히 이해하는 출발점이라고 단언했다.
SNS의 그 '밥솥'은 어떻게 디자인됐을까? |
제품 카테고리의 디자인 다양성에 주목해 만든 쿠쿠 ‘트윈프레셔’. 검정과 골드가 주를 이루던 국내 전기밥솥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산업디자인과 공간디자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최중호 디자이너. 3M 밀대부터 쿠쿠 전기밥솥, 하이메이드 헤어드라이어 같은 제품디자인을 넘어 공개를 앞둔 신영건설의 공유주거 프로젝트까지 디자인 영역을 확장했다. 13년째 본인의 이름을 딴 ‘최중호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다.
-SNS 리뷰로 먼저 주목 받은 제품이 있다. ‘예쁜 밥솥’으로 불리는 쿠쿠 트윈프레셔. 디자인 작업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정확하게 “이런 게 왜 없었지?”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특별하거나 특출난 디자인이 아니다. 해당 제품은 ‘디자인 다양성’에 주목한 결과다. 당시만 해도 럭셔리한 밥솥의 기준은 블랙과 골드였다. 그런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는 걸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밥솥 디자인의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개발 당시는 발뮤다나 플러스마이너스제로 같은 흰색 디자인 가전이 인기를 막 끌기 시작한 시기다. 최종 결정까지 1년 정도가 걸렸다. ‘뭐가 예쁘냐’가 아니라 국내에서 전기밥솥 카테고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를 먼저 생각했다. 국내 시장상황, 국민성, 여러 트렌드를 종합해 시장에서 매출을 높일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디자인 언어만으로는 충족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제품 카테고리를 먼저 이해했고 어둡고 무게감 위주인 국내 밥솥을 바꿔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주방 수전만 봐도 실버나 화이트 계열이 많다. 그럼 밥솥도 화이트와 실버로 구성하면 잘 어우러지겠다고 생각했다.
사용성이 곧 디자인 라인으로 완성된 하이메이드 가습기.
시로코 타입의 하이메이드 헤어드라이어는 접었을 때 모양까지 고려해 디자인됐다. 입구와 본체 끝라인을 의도적으로 맞춰 정돈된 느낌을 준다.
-특히 전자제품은 기능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하다 보니, 한계가 더 뚜렷하지 않나.
△그렇다. 각 제품의 기능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 하이메이드 가습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가습기는 들고 물을 뜨러 가야 한다. 물통인 상체 파트를 들고 가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윗부분만 쉽게 들어낼 수 있게 단차를 줬다. 물통 뚜껑은 손으로 열어야 하니 아크 형태로 만들고 물이 분사되는 윗부분은 마음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고 회전도 가능하게 디자인했다. 발전된 기술이 들어간 게 아니라 단순한 라인과 단차들로 사용성이 향상되게 설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용성이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가도 함께 고민한다.
하이메이드 헤어드라이어는 롯데하이마트라는 유통사의 관점에서 디자인을 고민해야 했다. 제조사인 유닉스와 협업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유닉스의 기존 생산라인 틀 안에서 디자인으로 변화를 줘야 했다. 보시다시피 특출난 디자인은 아니다. 시로코팬 형태의 헤어드라이어 중에 접이식은 거의 없는데, 놓여있을 때 더 깔끔한 느낌을 주기 위해 손잡이를 접을 수 있게 했고, 선도 정돈된 느낌을 위해 실리콘 덮개를 부착했다. 팬 부분은 감성적인 어필을 위해 패턴을 적용했다. 하이메이드 제품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이다. 약간의 변화와 정리가 소비자를 설득한 셈이다.
대량생산+취향=디자인플랫폼 |
‘에피소드 성수 101’은 ‘이케아 해킹’이라는 디자인 플랫폼을 적용했다. 각 방에 뼈대가 되는 기존 구조물을 설치하고 거주자가 원하는대로 이케아 유닛을 조합하는 방식이다.
-‘합리적 생산시스템’을 고려한 디자인 원칙이 공간에도 적용됐다.
△대량생산은 모든 제품 디자이너의 디자인 원칙인데, 이는 공간에서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간 디자인은 대량생산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마음껏 재료를 쓰고 표현하지만, 최중호 스튜디오는 기반이 산업 디자인이기 때문에 공간에서도 의미 없는 표현을 최대한 지양한다. 반드시 있어야 할 의자, 테이블 같은 가구에 힘을 주고, 그 외적인 것은 스탠다드하게 표현하는 것. 선반을 짤 때도 ‘구조 중심’으로 생각한다. 로비였던 곳이 때에 따라 전시공간이 될 수도 있고 팝업 쇼룸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이런 점을 고려해 선반 파트, 구조를 만들어놓고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디자인 솔루션을 제안한다. 제품디자이너가 접근하는 디테일들이 많이 들어간다. 최근 공유주거인 ‘에피소드 성수 101’도 마찬가지다. 비용의 대부분은 인건비다. 이건 줄일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제안한 ‘합리적 디자인 솔루션’이 공사 없이 아이템을 대량화해서 방안에 배치하는 ‘이케아 해킹’이다. 이케아 제품을 주거자가 어떻게 배치하고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다 달라질 수 있게끔 플랫폼을 만들었다. 의자 좌판은 우리가 디자인하고, 철제 다리는 이케아 것. 벽 패널도 기본 공사만 해놓고 선반은 이케아 유닛을 끼울 수 있게끔 만들었다. ‘침대는 창가에 있었으면 좋겠다’, ‘책상이 필요 없다’ 같은 구체적인 피드백은 직접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또 살면서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기도 한다. 이런 변화에 따라 공간도 바뀔 여지가 있어야 한다. 살면서 딱 맞는 공간을 만들어내게끔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그렇게 풀어내봤다.
-과감한 색상을 사용한 것도 눈에 띈다.
△ 적정 임대료가 중요한 공유주거라는 환경 특성상 고급소재를 사용해 차별화 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공간의 사이즈나 스케일로 새로움을 전달하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이 오피스텔이라는 틀을 깨고 봐줬으면 했는데, 밋밋한 변화는 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칼라를 쓰는 걸 좋아하는 것도 있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너무 무채색을 좋아하다 보니 의도적으로 유색을 쓰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내외부의 경계 허문 공용공간 디자인 |
내외부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스트리트 요소를 곳곳에 가미한 ‘제로라운지. 입주자들을 위한 공용공간이다.
‘제로라운지’의 월 패널은 행사나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게 설계됐다.
공사장을 연상케 하는 ‘제로라운지’의 테이블이 날것의 느낌을 준다.
벽 전체에 격자 무늬의 철조망을 덧대 공간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었다.
-에피소드의 공용공간인 ‘제로라운지’는 길거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인 것 같은 공간을 구현해낸 과정이 궁금하다.
△ 공용라운지라는 공간이 ‘거리’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것처럼 쓰지만 자기 건 아니고, 지나가거나 쉬면서 거주민들이 즐기는 곳이므로 ‘거리’의 요소와 공통점이 있었다. 외부 마감재인 벽돌을 실내에도 쓰고, 밖에서 쓰는 철제가구를 패브릭과 함께 의도적으로 배치해 실내외 경계를 허물었다. 도료도 건물 외벽에 쓰는 마감재를 썼다. ‘벨트드라이브’ 조명은 우연히 접하게 된 철조망에 신발이 매달려 있는 사진이 영감이 됐다. 강렬한 스트리트 패션과 인더스터리얼 무드의 대비가 멋있었다. 제로라운지의 벽은 길거리 벽보처럼 상황에 따라 교체 가능한 형태로 구성했다.
-오픈 세면대를 구상하게 된 이유는?
△ 원룸에 산다면 다들 공감할 거다. 문을 열면 꽉 막혀있다. 입구에서 사진을 찍으면 화장실 벽에 가려 방이 안 보인다. 좁은 공간이지만 넓어 보였으면 했다. 오픈 세면대를 놓음으로써 시야가 뚫리면 공간이 풍부해진다. 거주자가 불편하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은 세면대를 화장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쓸 수 있게 하는 걸로 해결했다. 화장실 안에서 미닫이 문을 열면 세면대를 쓸 수 있다. 거울도 안팎에서 모두 쓸 수 있게 회전 가능하다.
-디자이너이자 13년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사업가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어떻게 밸런스를 유지하나.
△ 나는 이상주의자다. 개인적 삶과 대표로서의 삶이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 팀원들과 깊이 교감하기 위해 대화를 많이 한다. 그러다 보니 회사 대표로서의 메시지와 디자이너로서의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클라이언트와도 마찬가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감하는 전투력’이 있으면 카테고리와 관계없이 디자인을 해낼 수 있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필요한 경험은 '소비' |
각도 전환이 자유로운 ‘BELT DRIVE’ 조명은 ‘라이마스’를 통해 판매된다.
인더스트리얼 무드가 느껴지는 RC체어. ‘레어로우’를 통해 출시될 예정이다.
-디자이너로서의 ‘공감능력’이란 뭔가.
△ 디자인 소비층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디자인을 소비한다.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을 때 저축은 절대 안 하고, 소비하는 걸로 배우겠다고 선언했다. 돈을 내서 습득하는 감정과 경험을 디자이너는 느껴야 한다. 100만원짜리 소파를 쓰던 사람이 1,000만원짜리 소파를 사려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한다. 겨울에도 어울릴까 여름에도 괜찮을까? 그런 소비자의 마인드에 ‘공감’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 창의적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젊은 디자이너들 중에 여유로운 사람이 얼마 없다.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팀원들의 이런 소비경험의 차이, 간극을 좁히는 데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그게 대표로서의 ‘공감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GS자이의 아파트 바깥 환경디자인을 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커지면서 수영장, 카페, 피트니스, 하원 스테이션, 정원, 경로당, 어린이집 같은 커뮤니티 시설이 많아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하나의 마을이다. 마을의 전체적인 개념을 잡는 작업이다. 마감재일 수도 있고 조경일 수도 있고 분위기일 수도 있고 인테리어일 수도 있고 어떻게 접근하는 게 맞느냐라는 큰 디자인 가이드다. GS자이의 커뮤니티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개념 디자인. 기본 전제는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기준을 잡고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할 수 있다. 살다 보면 느끼는 것들이 있다. 아이를 데려올 때 갑자기 비가 내려 쫄딱 젖은 경험이 있다면 우리 아파트 하원스테이션에는 왜 차양막이 설치되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다. 경험에서 오는 디자인은 예쁘게 꾸미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젊은 디자이너들 중에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런 간극을 좁혀주려고 팀원들과 정말 많은 아파트를 답사하고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볼 수 있게 거주자들과 인터뷰를 많이 진행했다. 소비자로서의 감정이입은 소비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간 디자인한 제품들을 모아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구체적인 계획이 생겼나.
△ 곧 ‘최중호 스튜디오’가 디자인한 신영건설의 공유주거가 공개된다. 예비 입주자를 위해 꾸며진 방, 모델하우스 같은 건데 그 곳에 그간 디자인한 생활가전 등으로 채워 넣을 예정이다. 나중에는 직원들과 워크샵 하는 공간이자, 공유숙박처럼 빌려주기도 하는 공간도 마련해보고 싶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사진제공=최중호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