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SCI논문 망국병으로 창업 실종...실리콘밸리처럼 서울에 AI밸리 추진"

<박희재 서울대 AI밸리추진단장>
IMF땐 '같이 해보자' 의욕...지금은 창업 열기 사라져
인사에 산학협력실적 반영되지 않아 논문쟁이만 양산
미국이나 중국처럼 대학가에 '과학기술밸리' 만들어야
"공원부지·그린벨트 규제 많고 컨센서스도 부족해 고민"

서울대 AI밸리추진단장인 박희재 기계공학부 교수가 2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20년 전 IMF 경제위기 때는 ‘다같이 해보자’는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는데 지금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며 혁신 창업가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국내 대학은 국가 연구개발(R&D) 자금의 3분의1 이상을 받는다. 지난 2018년 정부 R&D 예산이 약 16조원일 때 6조원(37.5%)가량을 받았다. 내년 정부 R&D 예산은 27조 2,000억원이다. 그 결과 논문과 특허를 대거 양산했지만 정작 기술사업화는 크게 부족했다. 특허 기술이전 수입이 특허 유지료보다 더 적은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대학은 여전히 상아탑(象牙塔)에 머무르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 올해까지 13년째 대학 등록금이 동결된 가운데 정부 재정 지원에 의존하는 천수답 경영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이 혁신성장의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교수 중 대학 실험실 벤처1호로 통하는 서울대 AI밸리추진단장인 박희재(58) 기계공학부 교수는 2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약 20년 전 IMF 경제위기 때는 ‘벤처를 창업해 국가에 기여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에너지가 소진돼 그때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에 도전하고 이를 키우는 생태계나 기업가정신이 없다”면서 “대학이 정부에 의존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에 몰두하는 논문쟁이나 양성하지, 국가와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혁신적인 기업가를 키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IMF 시절 ‘금 모으기 운동’을 본 뒤 수출기업 창업을 결심하고 청와대 등에 교수와 회사대표의 겸직이 가능하도록 요청해 관철시켰고 실제 창업해 코스닥에도 상장시켰다.

-과거보다는 대학의 창업이 좀 늘고 있는 것 아닌가.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다. 기업가정신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 혁신창업에서 치고 나가야 우리가 모두 사는데 여전히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 편수만 따진다. 이런 식으로는 대학에 100조원을 지원해도 소용없다. 20년 전 제가 창업할 때에 비해 변화했다는 점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대학에서 기업 하려면 음지에서 해야 할 정도다. ‘나도 창업해야지’ 이런 분위기가 돼야 하는데 불이 안 붙는다. 냉골이다.


-창업이 왜 잘되지 않는가.

△여전히 논문이 임용·승진 평가와 대학기관 평가를 좌우한다. 논문만 잘 쓰면 된다는 게 대학 당국자들의 기본 생각이다. 교수가 관성대로 움직인다. 대학원생은 눈치 보기 때문에 못 한다. 문재인 정부가 돈을 많이 풀고 있지만 대학의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창업하도록 용기를 북돋우고 ‘졸업 후 창업하겠다’고 하면 자금을 지원해줘야 한다. 그게 안 되니 대학원생 보고 ‘창업하라’고 하면 고개를 젓는다. 기술고시에 응시해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취업하려고 한다. 포스닥(박사후과정)까지 고학력 비정규직이 많은데 정부 R&D 예산으로 먹여 살리고 있다. 혁신기술이 시장에서 꽃 피울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

-대학에서 기술지주회사도 만들고 창업도 독려하지 않나.

△규정에 얽매이다 보니 창업신청서를 내고 겸직하려고 해도 4건 중 1건 정도만 통과된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안 된다고 해 오히려 용기를 꺾는다. 대학 기술지주회사가 창업기업의 지분을 20% 이상 갖도록 하는 것도 독소조항이다. 감이 없는 공무원이 만든 죽음의 규정이다. 그러니 비공식적으로 음성으로 하거나 바깥에서 창업한다. 불법과 탈법의 경계선에 있다.

-어떻게 하면 창업을 활성화할 수 있겠나.

△창업에 성공해 학교에 크게 기여할 경우 정교수로 임명하겠다고 하면 창업을 많이 할 것이다. SCI 등재 논문이나 쓰려고 해서야 되겠나. 논문을 위한 논문도 많다. 이른바 ‘SCI 망국병’이다. 대학이 창업하도록 격려하고 좋은 연구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리스크를 줄여줘야 한다. 임용·승진·정년보장 트랙에서 창업이나 산학협력 실적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대학들이 영국 대학평가 기관인 QS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놀아나고 있다. 논문 쓰고 QS 기준 맞추는 것도 힘들어 창업하고 산학협력 하는 것 거의 다 포기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R&D 과제를 수주할 때도 창업이나 산학협력 실적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다.

박희재 서울대 AI밸리추진단장이 실험실에서 반도체·디스플레이 계측장비를 설명하고 있다.

-교수님 연구실에서도 누가 창업했나.

△반도체·디스플레이 박막 측정 연구를 하는데 베트남 출신의 한 학생이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한 뒤 창업에 성공해 삼성전자 현지법인 등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다. 정작 제가 100여명의 석박사를 지도했으나 국내 출신 중에는 창업자가 없다. 다만 학부시절 제 지도를 받고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창업해 미국 기업에 매각한 제자만 있다. 왜 한국 대학원생이나 졸업생은 창업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기업과 함께 연구할 기회를 많이 주는데도 그렇다. 스타트업을 창업해도 좀 커지면 곧장 데스밸리에 들어가는데 그 뒤에는 지원이 없다. 금융권의 연대보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창업해서 기업공개(IPO)까지 1~2%, 인수합병(M&A)돼 엑시트(이익환수) 하는 게 1~2% 확률에 불과하다. 중간중간에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 정부가 조달품목으로 스타트업과 벤처의 물건·서비스를 많이 사줘야 한다.

-서울대 AI밸리추진단장인데 애로사항이 많겠다.


△그렇다. 인공지능(AI)을 지향하는 창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규제들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학내 구성원의 인식도 별로 바뀌지 않고 지원 펀드 생태계도 취약하다. 처음에 ‘낙성대밸리’라고 했다가 신림동 활성화까지 염두에 두고 ‘AI밸리’라고 부르게 됐다. 여기서 연구·개발하고 실험하면서 스타트업과 대기업, 글로벌 기업 등이 바글바글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인수합병(M&A)도 활성화해야 한다.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해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30년 이상 걸릴 것이다. 많은 교수가 연구년에 국내 기업에서 활동하면서 산학협력이나 창업 성공의 스토리를 보여줬으면 한다. 하지만 학내 컨센서스가 부족하고 너무 힘들다. 내부에서 활활 타올라 실험실에서 창업하자고 하는 분위기가 없다. 오죽했으면 베트남에서 학생을 수입해 창업시켰으면 하는 심정이다.

-실리콘밸리도 처음에는 과수원이었는데.

△맞다. 그렇게 출발했다. 1891년 스탠퍼드대 개교 당시 대학 근처가 과수원 농장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레더릭 터먼 공대 학장이 많은 연구비를 끌어오며 ‘졸업생들이여 창업하라, 대학이 도와주겠다’고 역설했다. 이후 벤처 붐이 조성되며 점차 실리콘밸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울대 AI밸리도 그렇게 만들고 싶다. 창업과 산학협력 생태계를 조성해야 하는데 현실은 안타까운 수준이다. AI밸리를 만들기 위해 공원 부지와 그린벨트를 서울시와 국토교통부 등 정부가 풀어줘야 한다. 혁신창업을 정부가 북돋워줘야 한다. AI밸리는 지금 마스터플랜을 세우는 단계로 10~20년 앞을 내다보고 추진해야 한다.


-실험실에 가서 학생연구원들과 같이 얘기해보자.

△(이동해 연구장비를 설명하며) 이런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논문을 먼저 쓰면 기술이 공개된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논문 지원비는 많지만 시간이나 돈이 들어가고 혁신성 등을 따지는 특허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특허도 양적으로는 많이 내더라도 질적 관리에는 관심이 없다. 저희 연구실은 중요한 특허를 먼저 내고 논문을 쓰라고 하는데 실제 논문도 많이 쓴다. 제가 국내외 특허를 150여건 내고 논문 200여건을 발표했는데 학생들도 많이 한다.

-창업국가 하면 이스라엘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이 디아스포라(해외에 흩어져 살며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 생활을 해 자식이 법조인이나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다가 15~20년 전부터 바뀌었다. 벤처기업가가 선호 1순위가 된 것이다. 나스닥 상장 등 대박 스토리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도 김대중(DJ) 정부 때 벤처 붐이 불며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이후 닷컴버블이 꺼지고 벤처기업에 대한 엄청난 규제 일변도 정책이 이어졌다. 저도 당시 이장무 서울대 공대 학장님이 ‘창업이 유행인데 해봐, 도와줄게’라고 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은 누구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각자도생을 시도한다. 당시 교원이 창업해 대표를 겸직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벤처기업특별법이 바뀌며 허용됐다. DJ 시절이니까 바뀐 것이다. 지금은 바뀌기 어렵다. 그때 ‘금 모으기 운동’에 감동을 받아 ‘내 기술로 창업해 1달러라도 벌어 국가경제에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학장이 창업하라고 하니 천군만마였다. ‘나라가 누란지위인데 법을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줄 것’이라는 믿음이 왔고 청와대와 규제개혁위원회에 얘기해 절차상 2년이상 걸렸지만 결국 성공했다.

-지금이 그때보다 나아진 게 없나.

△교수가 손에 먼지나 기름때 안 묻히고 논문 쓰고 학생 가르치며 잘살 수 있는데 누가 기술창업에 나서겠나. 창업하는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면 왜 나서겠나. 이런 식이면 10~20년 뒤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텐데 어떻게 감당할지 두렵다. 지금은 IMF 위기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다. 그때는 부글부글하는 내재적 에너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래처럼 흩어져 있다. ‘한 번 같이 해보자’는 문화가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세계가 어렵지만 지금이 기회인데 대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교수님은 코스닥 상장도 이뤄내고 기부도 많이 했는데.

△2005년 코스닥 상장 뒤 제 주식의 상당 부분인 80억원어치를 서울대에 기부했다. 당시 이종덕 초대 서울대반도체연구소장님이 새벽에 전화해 ‘당신이 몇조원 국가예산 만드는 것보다 귀한 일 했네’라며 격려해 주셨다. 이 분은 정부 움직여 반도체연구소 만드시고 많은 인재를 키워냈고 도연학술상도 만들어 저도 상을 탔다. 늘상 극일( 克日)을 강조했던 은사님인 故 김동원 교수님도 ‘잘됐다’며 많이 격려해주셨다. 이장무 당시 공대학장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 서울대 교수 창업자 중 제 기부 기록을 깬 경우가 없다. 창업 교수 중 이기원 농생명공학부 교수 등에게 ‘내 기록을 깨달라, 후배 리더를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대학에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예산을 100배 투입해도 소용없다. 좋은 생태계를 만드는 게 화두가 돼야 한다. 서울대가 제 역할을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 좋은 AI밸리를 키워야 20년쯤 뒤에는 세계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노벨상 몇 명이냐를 따지는 것은 소용없다. 스탠퍼드대가 실리콘밸리를 만든 것처럼 중국의 칭화대나 베이징대 인근에도 밸리가 잘 조성돼 있다. 그러나 서울대 부근에는 아무것도 없다. 박정희 정권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으려고 관악캠퍼스를 만들었는데 그린벨트 안에 있어 사회와 너무 격리돼 있다. 이제라도 AI밸리에 시동을 걸어 다행인데 20~30년 뒤를 보고 승부를 걸어야 한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1961년 경기 김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기계설계학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친 뒤 영국 맨체스터공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항공대 산업공학과 교수를 거쳐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1998년 IMF 경제위기 때 제1호 대학실험실 벤처인 에스엔유프리시젼㈜을 창업하고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검사장비 분야의 글로벌 리더로 성장시켰다. 7,000만불 수출탑, 은탑산업훈장, 되고싶고 닮고싶은 과학기술인상, 제1회 백남공학상, IR52 장영실상, 훌륭한 공대교수상, 서울대총동창회관악대상, 서울대 발전공로상 등을 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 제2대전략기획단장,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으로 서울대 AI밸리추진단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영국맨체스터대에서 공학원사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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