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40년 경력 엔지니어의 아쉬움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문제 해결 능력 책·논문에 답 없어
박사보다 나은데 전문연구원 못돼


20여 년 전 러시아의 유명한 연구소와 첨단측정장비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때 러시아 연구팀은 전체 과제를 조율하는 팀 리더 박사, 최종 장비 조립 및 완성을 담당하는 박사, 구동 이론 및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박사, 그리고 설계와 가공을 하는 기술원 등 총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구를 수행하다가 복잡하게 엉켜버린 문제를 풀어야 할 때 가장 훌륭한 해결사 역할을 한 사람은 박사급 연구원이 아닌 기술원이었다.

그는 환갑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였는데, 젊었을 때 우주 발사체의 설계를 담당했다고 했다. 그는 경험이 풍부했고, 모든 설계도가 머릿속에 들어있어서 일어날 만한 모든 가능성을 미리 계산할 수 있었다. 문제 해결의 열쇠도, 장비개발 연구의 성공 여부도 결국 그에게 달려 있었다.


필자는 연구소에 들어와 지금까지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매주 2번 이상 테니스를 치는 나에게 거의 20년 이상 코트에서 만나는 직장 동료가 있다. 우리 연구원의 기술원인 그는 다른 연구원들과는 달리 본인이 하는 새로운 첨단 장비를 만드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일하는 시간도 들쭉날쭉이다. 대부분의 경우 테니스 운동이 끝난 후인 9시 이후가 그가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이다. 밤 12시이든 새벽이든 일이 마무리되는 시간에 집에 간다. 그는 인사고과나 승진에도 관심이 없다. 단지 테니스와 일 이외에는. 연구소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이 분야 세계 최고라는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있다.

보통 박사급 연구자들이 하는 일은 논문 위주의 일이어서 실제적인 개발과제 완료 시점에서의 완성도는 항상 1% 부족하다. 그런 상태로 과제는 마무리되고 만다. 99%의 개발을 위해 3년이 걸리지만, 남은 1%를 채우기 위해서는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책이나 논문에서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하며 문제를 해결해 온 자칭 ‘도사’들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들은 바로 특급 엔지니어들이다. 그런데 박사급 연구원 몇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엔지니어들이 출연연구원에서 점점 사라져간다. 이런 엔지니어들이 없다면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과학기술 R&D 사업은 밑바닥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위로 올라가면 상황은 뻔하지 않겠는가?

요즈음 나의 테니스 동료는 새로운 장비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세계 최고 제품이라고 업계에서 알려진 장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저렴하며, 스마트한 설계기술이 탑재된 첨단 장비이다. 마이더스의 손처럼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형식의 장비나 부품이 개발된다. 하지만 그는 61세가 되는 내년에 퇴직을 해야 한다. 출연연구소에서 정년 이후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우수연구원이나 전문연구원으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사라는 타이틀은 없지만 박사급 연구원의 일당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술원, 그의 앞에 꽃길만이 있기를 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