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제지 신탄진 공장에 있는 초지기 측면 모습. 워낙 복잡한 구조에 규모도 큰 기계라 옆면에 작업자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계단이 많이 설치돼 있다. /사진제공=한솔제지
대양제지 화재로 골판지 톤당 가격이 최근 25%가량이나 급등하면서 초지기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초지기는 종이를 뽑는 기계다. 이 초지기가 화재로 2대나 소실되면서 골판지 수급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초지기의 가격은 대당 1,500억원에 이른다. 요즘 반도체 장비 가운데 가장 ‘핫’하다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1대 가격과 같은 수준이다. EUV 노광장비는 무게 180톤에 크기는 2층 버스 규모이지만 초지기는 이보다 더 크다. 가장 큰 것은 축구장 크기 만한 것도 있다. 작은 것도 아파트 108.96㎡(32평) 규모는 된다. 그러다 보니 화재나 안전사고 등이 발생해 초지기가 탈이 나면 종이 수급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워낙 고가인 탓에 장비를 놀릴 수도 없다. 그래서 제지공장은 1년 내내 쉬지 않고 돌아간다. 이런 배경을 알면 왜 제지 업계가 대형 초지기를 보유한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초지기는 국내에서 생산도 못 한다. 제지업종이 전통산업이자 사양산업인 탓에 국내 업체들이 뒤늦게 기술력을 키워 만들 엄두조차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이 거대 장비를 만들던 침엽수의 나라 핀란드, 그리고 기계 강국 독일, 일본 정도나 이 초지기를 생산한다. 워낙 크기가 거대해 통상 배로 이송한다. 비행기로 수입할 때는 부품을 다 분해해서 한국에서 다시 조립해야 한다. 당연히 이 초지기를 만든 기업의 엔지니어가 직접 와서 해야 가능한 일이다. 최근 신풍제지의 초지기를 한창제지가 인수했는데, 업계에서는 한창제지가 신풍제지 공장에서 자신의 공장으로 이 설비를 이동시키는데도 큰돈이 들 거라고 말할 정도다.
초지기 보유 대수는 그만큼 업계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뜻과도 같다. 지난해 1조 9,126억원의 매출을 올린 한솔제지는 총 9대, 1조 2,231억원의 매출 기록한 무림은 총 6대를 보유 중이다. 한번 초지기를 도입하면 30년 이상은 너끈히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매해 수십 대씩 제조업체가 사야 하는 EUV 장비와 결정적 차이가 난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안전사고에도 바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인명 사고가 나면 공장을 못 돌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부쩍 강화되면서 사고에 따른 처벌 대상이 대표 등으로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제지업계의 한 임원은 “과거 한 대형 제지업체에서 사망사고가 났는데 연관 초지기는 단 1대였지만 수사 등으로 3대의 초지기 운영이 한 달 간 중단돼 실적이 크게 나빴던 사례가 있다”며 “이는 최근 제지업체 안전투자가 대거 증가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