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왼쪽 세번째) 현대차그룹 회장이 ‘CES 2020’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6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호텔에서 열린 현대차 미디어데이 뉴스 콘퍼런스에서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미래 현대자동차그룹은 자동차 50%, 개인항공기(PAV) 30%, 로보틱스가 20%인 모빌리티 서비스 회사로 변모할 것입니다.”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이 수석부회장 시절이던 지난해 10월 임직원들에게 밝힌 구상이다. 약 1년이 지난 10일 정 회장의 이 같은 미래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글로벌 인수합병(M&A) 소식이 들려왔다. 대상은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기술을 보유한 보스턴다이내믹스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미래 ‘삼각편대’ 중 한 축인 로보틱스 분야에서 최적의 파트너를 찾았다는 평가가 나온다.현대차가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은 향후 ‘라스트 마일’ 물류 시장에서 로봇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량이 큰 줄기의 물류를 담당하고 소비자에게 다다르는 마지막 ‘실핏줄’ 단계는 무인로봇이 책임지는 형태다.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출시한 4족 보행 로봇 ‘스폿’은 360도 카메라를 장착하고 네 발로 초당 1.58m의 속도로 뛰거나 계단을 오를 수 있다. 2족 로봇과 달리 등에 화물을 적재하기 쉽고 평지뿐 아니라 계단 이동속도가 빨라 물건을 나르는 데 최적화 돼 있다는 평가다. 이는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이 제공할 서비스라고 천명했던 ‘끊김 없는 이동(seamless)’과도 맞닿아 있다. 라스트마일 로보틱스를 잘 활용하면 로봇이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갖다 주거나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으로 사람을 직접 이동시키는 역할도 가능하다.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가 “인류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이동에 기여하겠다”는 정 회장의 구상을 현실화시킬 퍼즐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은 현존하는 4족 보행 로봇 중 가장 기술이 뛰어나다”며 “현대차는 양산과 가격 경쟁력에서 큰 강점을 갖고 있어 기술이전 등이 원활하게만 이뤄진다면 정 회장이 얘기한 ‘삼각편대’의 한 축이 확보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로보틱스 산업에서 중국 업체가 양산 단계에 근접해 있는데 현대차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협력관계가 시너지를 내면 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현대차 외의 다른 대기업들도 M&A 등 투자를 통해 미래 먹거리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자 업계에서는 총수들이 직접 나서서 사업구조 개편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지난달 10조원을 들여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 부문 전체를 인수하기로 결정한 데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결단이 크게 작용했다. 1위인 삼성전자를 제외하고 경쟁력이 비슷비슷한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후발주자로서 빠른 추격을 위해서는 점유율 점프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수로 SK하이닉스는 점유율 5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 특히 이번 인수는 인텔의 고객사뿐 아니라 인적 자원까지 확보해 장기적인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 강화까지 계산돼 진행됐다. 이석희 SK 사장은 “SK하이닉스의 낸드 매출을 5년 내 3배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존 캐시카우인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주력 산업인 전자에 바이오, 자동차 전장 등 미래 먹거리 강화를 위한 사업구조 재편을 해왔다. 이 부회장은 직접 해외출장을 다니며 대규모 M&A 대상 기업들을 만나는 한편 전 세계에 걸친 삼성 공급망 재편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포스트 반도체’로 꼽히는 배터리 업계도 ‘바이든 호재’를 만나 공장 증설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 배터리 공장 추가 증설을 예고하고 있고 LG화학은 제너럴모터스(GM)와 연산 30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이는 1년에 자동차 5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배터리 소재 쪽도 투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리막 사업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첫 해외 생산 거점인 중국 창저우 라인 가동을 최근 시작했다. 내년부터 2년간 순차적인 증설 계획까지 이미 세워놓았다. 폴란드에도 내년 3·4분기 가동을 목표로 공장을 짓고 있는데 준공도 하기 전에 추가 증설을 결정지었다. 회사 관계자는 “과감한 투자로 정유화학 중심 비즈니스를 배터리·소재로 확장하는 딥체인지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LG화학도 충북 청주에 약 2,000억원을 들여 연산 3만톤 규모의 양극재 설비 증설에 나섰고 내년에도 연산 6만톤 규모의 구미 공장을 착공한다. LG화학이 최근 중국 화유코발트와 합작한 양극재 합작법인도 지난달 말 양산에 들어갔다. 삼성SDI는 양극재 생산업체인 에코프로BM과 합작 형태로 포항공장 증설에 투자했다. 재계 관계자는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기업의 ‘빈칸 채우기’가 M&A와 투자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라며 “미래에는 차별화된 기술을 가진 기업만 살아남는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박한신·변수연·한재영기자 hs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