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아침에] 48년생 전태일, 98년생 전태일

정민정 논설위원
50년전 목숨바쳐 세운 '노동자 권리'
경직된 노동 구조·노조 이기주의에
청년 4명중 1명은 실업자로 내몰려
기성세대 양보없인 영영 기회없을것


내일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다. 1948년생인 그가 살아 있다면 일흔을 넘겼을 테고 1998년생 손주를 뒀을지도 모른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당시 태어난 98년생 청년들은 올해 23세, 열사가 산화한 바로 그 나이다. 상당수는 내년 2월 대학을 졸업한다. 지금쯤 한창 입사 원서를 쓰고 면접을 다닐 시기다. 하지만 대기업 넷 중 세 곳은 신규 채용 계획이 없어 원서 낼 기회조차 사라졌다. 청년 넷 중 한 명이 실업자 신세다.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이 166만명(5월 기준)에 달한다. 사상 최대치다. “불합격 통지서라도 받아보고 싶다”는 하소연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지난 50년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화 속에 양적·질적 팽창을 누렸다. 1970년 250달러에 그쳤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88년 4,000달러로 뛰었다. 올해는 3만1,000달러로 예상된다. 1988년 시급 462원으로 시작한 최저임금은 올해 8,590원까지 올랐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처음 적용된 최저임금이 30여년 만에 18배 넘게 오른 셈이다.

하지만 노동 시장은 극심한 양극화와 자기모순에 몸살을 앓고 있다.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한 노조 이기주의와 대기업 정규직에 혜택이 집중된 이중 구조가 주범이다. 한번 고용하면 해고하기 어렵게 돼 있는 노동법에 기대 정규직 근로자들은 고임금과 고용 안정을 누린다. 저성과자라도 정년까지 버틸 수 있고 임금 인상의 과실은 덤이다.


40~50대 기성세대가 양질의 일자리를 독차지하면서 세대 갈등은 심화하는 양상이다. 주요 대기업이 속한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조합원 중 50대 비중은 40%에 육박한다. 현대자동차만 해도 조합원 5만여명 중 50대가 절반에 달한다.

조선·유통·정보기술(IT) 등 산업 전반에서 활력이 떨어지고 있지만 신입 직원을 채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기업규제 3법에다 노동법 등 각종 규제로 기업들은 일자리 창출은커녕 당장 내일도 장담하지 못한다. 설상가상 정부 여당은 청년 실업난을 부추길 게 뻔한 노동법 개정안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해고자나 실업자의 노조가입을 허용하는 노조법, 퇴직급여 지급대상을 1년 이상 근속에서 1개월로 늘린 퇴직급여보장법 모두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청년들이 응당 누려야 할 기회를 걷어차는 ‘선의의 역설’을 낳고 있다. 청년 전태일이 목숨을 바쳐 ‘노동자의 울타리’를 세웠지만 그 울타리가 ‘98년생 전태일’로 상징되는 수많은 청년을 배척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기란 쉽지 않다. 또 지금처럼 경제위기가 심화할수록 대기업과 공공부문 근로자보다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고용의 활력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다. 동시에 ‘일자리 정부’를 표방했던 문재인 정부가 노동개혁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파 정부보다 좌파 정부가 지지기반인 노조를 설득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2002년 시작된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성공한 노동개혁의 대표적인 사례로 좌파인 사회민주당 집권 당시 추진됐다. 이탈리아가 2015년 추진한 강력한 노동개혁 법안도 중도 좌파인 민주당 소속 총리가 주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아랫목을 차지한 기성세대의 양보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이뤄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내딛게 되면 다음 발자국도 그 뒤를 따를 것이며 올바른 방향을 향한다면 그 발걸음은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기성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 아들딸에게 ‘대한민국이 아직은 살만한 나라’라는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48년생 전태일의 외침이 98년생 전태일의 절규로 끝나지 않도록 어른들이 먼저 한 걸음 내딛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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