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먹는 약 속에 이런 역사가[책꽂이]

■텐 드럭스
토머스 헤이거 지음, 동아시아 펴냄


당신은 하루에 몇 개의 약을 먹는가. 미국인은 1년에 4~12가지 처방 약을 복용하고, 평균적인 미국 노인은 하루에 약 10여 개의 약을 삼킨다. 여기에 비타민, 아스피린, 건강기능식품 등을 합치면 미국인들은 평생(평균 수명 78.54년) 5만 개 이상의 약을 몸에 털어 넣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국의 의약품 처방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보다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르긴 몰라도 한국인 역시 미국인 못지않은 양의 약을 먹고 있을 것이다. 아플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적지 않은 약과 함께 살아가는 ‘약 권하는 시대’. 신간 ‘텐 드럭스’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약을 선정해 이들의 역사를 짚어보는 동시에 약의 흑역사·거대 제약 산업의 부조리 등을 두루 살펴본다.

약의 효용은 비단 ‘건강한 삶’, ‘질병 퇴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대 중국에서 여성들은 임신을 막으려고 납과 수은이 들어간 용액을 마셨다. 중세 유럽에선 고양이 뼈로 만든 부적, 족제비 고환을 허벅지에 붙이거나 임신한 늑대가 오줌 눈 곳을 세 바퀴 도는 행위도 기꺼이 감수했다. 혼외 임신은 죄악이고 임신은 기회 축소이자 평생에 걸친 가사 책임의 시작이던 시절, 금욕 말고는 임신을 방지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 록펠러재단의 관심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자·인권운동가들이 사회적 탄압 속에서도 피임 연구를 이어갔고, 1957년 에노비드(초기 피임약 상품명)가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피임약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루트비히 하벌란트는 ‘신의 영역을 인간이 통제하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미국에서는 최초의 피임 클리닉을 연 사회행동가가 체포되기도 했다. 피임약이 등장하기 전 미국 여성의 이상적인 삶은 고등학교 졸업 후 시집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임약의 등장과 함께 여성의 초혼 연령이 상승하고, 여성 대학원생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임신 여부와 시기를 여성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식도 확산했다. 새로운 약의 등장은 그렇게 인류사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책은 이처럼 약의 개발 과정부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약 개발의) 숨은 영웅과 그들의 분투를 예리한 묘사와 함께 소개한다.

약의 흑역사도 비중 있게 다룬다. 제약회사들은 질병을 치료할 새로운 약물을 끊임없이 개발하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은 새로 개발된 약물에 중독된다. 이 같은 사례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완벽한 약은 없다’는 것이다. 약 덕분에 인류의 평균 수명이 크게 늘어났지만, 그 못지않은 어두운 면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약의 부작용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인 거대 제약 산업의 현실과 부조리를 고발한다. 1만 7,000원.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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