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깬 미 대통령의 '불문율' 20가지

WP "사익편취·임명권 남용 등 트럼프가 20개 규범 깨"
법조문 행간 규범으로 발전한 미 대통령제 유연성 훼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AFP연합뉴스

“대통령으로서의 규범을 어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국민투표였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1일(현지시간) 이번 대선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미 헌법 제2조는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 규정하지만 최소한에 그친다. 빈자리의 상당 부분은 성문화되지 않은 대통령직에 대한 전통이나 기대가 채우고 있으며,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은 이를 ‘규범’이라고 부른다.

규범을 어기는 게 곧 법률 위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규범을 깬 피해는 대통령제와 민주주의에 장기간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게 WP의 지적이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규범을 넘나들면서 대중영합주의의 동력으로 삼았다며, 그가 어긴 20가지 대통령직의 규범을 제시했다.

우선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직을 이용해 사익 취했다고 봤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때부터 역대 대통령은 취임하면 자신의 재산을 백지 신탁으로 돌린다. 공직자로서 정책 결정이 사적 이익에 영향을 주는 이해 충돌을 막기 위해서다. 대통령은 이해 충돌 규정에 적용되지 않지만, 역대 대통령들은 이를 규범으로서 준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부터 지켜온 규범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리조트를 포함한 부동산의 소유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심지어 지난 10월 말 현재 자신 소유의 시설에 280번을 방문했다고 WP가 자체 통계를 근거로 밝혔다. 이에 따라 백악관 경호국이나 다른 정부 기관들은 경비로 최소 250만 달러(27억 8,000만원)의 예산을 사용했고, 트럼프 캠프나 정치자금 모금위원회도 560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납세 자료 제출 관행도 깼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지난 1973년 ‘세금 스캔들’에 휩싸였을 때부터 시작된 대통령의 납세 자료 제출 관행은 트럼프 때 멈춰 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감사 중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감사는 납세 자료를 제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게 WP의 설명이다. 듀크대 닐 시겔 법학 교수는 “납세 자료를 공개하면 외국과 연계돼 개인적 이익을 취했는지, 세금을 제대로 납부했는지 알 수 있다”며 “대통령이 지켜야 할 규범이 헌법에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헌법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보기관과 국방, 국무부 등의 분야에 감찰관을 해고하는 등 내부 감찰관 제도를 무시하고 임명권을 남용했다. 특히 탄핵 심판까지 이어진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내부 고발자 처리에 불만을 품거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단 장비가 부족하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관련 부서의 감찰관을 해고하기도 했다. 감찰관 제도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정부의 직권남용을 막기 위해 지난 1978년 시작됐다. 로널드 레이건·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해고한 전례는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처럼 많이 하지는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대행 체제가 흔해졌다. 그만큼 헌법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 상원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임명이 많았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인사를 해고하고, 충성파를 그 자리에 앉혔다고 WP는 주장했다.

지난 1970년대 말부터 행정부는 대통령이 법무부의 사건 조사에 개입하지 않도록 경계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러한 전통이 깨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스캔들’과 같은 자신의 최측근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지 않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전임 행정부 인사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요구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연방수사국(FBI) 수뇌부와도 갈등을 빚었다. 특히 러시아가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수사 결과에 대해 몹시 불편해 했다. 그는 정보기관들이 이란과 북한에 대해 자신과 다른 입장을 내놓자 트위터에 “극도로 수동적이고, 순진하다”며 “학교로 돌아가 다시 배워야 한다”라고 조롱했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 무시하며 독재자와 밀월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설립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기구에 대한 리더십을 버리고 방위비를 빌미로 징벌적 무역 합의를 요구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등 독재·권위주의 국가 정상에는 우호감을 나타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는 ‘러브 레터’를 받았다고 자랑삼아 얘기도 했다.

이외에도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 품격 없는 언행 △ 군의 정치화 △재판부 공격 △ 외교의 정치화 △ 연방대법관 후보군 공개 △ 거짓 또는 오도된 주장 남발 △ 사면권 남용 △ 정치 목적에 정부 자원 이용 △ 인종주의 활용 △ 위기 때 국가 분열 △ 과학자 불신 △ 대선 토론 전통 훼손 △ 대선 결과 신뢰성 훼손 등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WP는 규범을 모두 법문화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미국 제도의 장점은 법조문의 행간을 규범이 채우고 이를 통해 대통령제가 발전할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만 캠페인리걸센터(CLC)의 트레버 포터 소장은 “이미 선을 넘었기 때문에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게 됐다”며 “앞으로 대통령들은 자신에게 편한 내용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웅배 인턴기자 sedati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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