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강애란의 개인전 ‘숙고의 서재’ 전시 전경.
“여성들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될 자유를 얻을 때, 그들이 무엇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여성들이 사랑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지성을 키울 수 있을 때, 그들의 지성이 어떤 것으로 기여할지 누가 알겠는가?”
미국의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1921~2006)이 대표 저서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에 적은 문장이다. 1963년 출간된 이 책이 미국 여성운동사에서 ‘제2의 물결’을 일으킨 기폭제로 불리건만, 이후의 긴 시간을 거치며 여성의 권리와 지위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현대미술가 강애란(60·이화여대 교수)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책을 집어 던지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갤러리 시몬에서 열린 강애란 개인전 ‘숙고의 서재’ 전시 전경.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 시몬에서 9월 17일 개막한 강애란의 개인전 ‘숙고(熟考)의 서재’가 지난 14일 막을 내렸다. 앞서 2016년 아르코미술관이 중진작가 초대전으로 기획한 ‘자기만의 방’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이며, 2015년의 ‘빛나는 도서관-위안부’ 전시로 촉발된 근현대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와 삶을 페미니즘으로 심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문학·철학·사회학·미술사 등으로 촘촘히 파고든 전시라 주목을 끌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펼쳐진 책이 마치 날개처럼 보이는 페인팅 결합형 디지털 신작들이 선보였다. 전시 현장에서 만난 강 작가는 “책장에는 여성학 서적들이 꽂혀 있고 그 옆 벽면으로 ‘집어던진’ 고전들이 날아다니는 셈”이라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아직도 갈 길 먼 여성 인권에 대해 당장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라고 소개했다.
갤러리시몬에서 열린 강애란 개인전 ‘숙고의 서재’ 전경.
책 이전에 작가가 주목한 것은 ‘보자기’였다. 그는 지난 1986년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한 첫 개인전을 통해, 제도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관념을 담은 ‘생각주머니’로써 보자기 작업을 선보였다. “단단한 소재로 제작해 절대 풀리지 않는 보자기는 사회에 팽배한 고정관념과 다를 바 없었다”는 작가는 1998년 작을 계기로 “보자기를 풀어버려 책이 드러나게” 했다. 그때부터 20년 이상 진행해 온 ‘책’ 작업은 인류의 지성사를 담은 또 다른 생각주머니로서 서적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겼다. 외견상으로는 책의 형태를 띤 정교한 플라스틱 박스 안에 LED라이트를 품은 일종의 ‘조명책’이지만 ‘디지털 북(Digital Book)’으로 명명된 이 연작은 일찍이 2000년대 초반부터 전자시대 이후 책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 문명사를 정조준했다.
갤러리시몬에서 열린 강애란 개인전 ‘숙고의 서재’ 전시 전경.
특히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시킨 작가는 근대기 선각자로서 신여성들의 생애에 주목했다. 그 결과 전시장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목소리를 다시 끌어낸 ‘리보이스(Re Voice)’를 비롯해 최승희·윤심덕·김일엽·나혜석 등 한국의 신여성에 관한 책부터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필두로 한 여성학과 페미니즘 고전들, 조지아 오키프·프리다 칼로·오노 요코·야요이 쿠사마 등 예술가이면서 삶 속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맞섰던 이들에 대한 책들이 경건하게 배치됐다. 이들 ‘빛나는 책’이 놓인 곳은 서재,서점,도서관인 동시에 ‘지성사의 성전’이자 ‘명예의 전당’으로 탈바꿈했다.
갤러리시몬에서 열린 강애란 개인전 ‘숙고의 서재’ 전시 전경.
전시 제목도 곱씹어봐야 한다. 앞서 그는 2009년 독일 칼스루헤 ZKM의 ‘책의 공간-숭고’에서 시몬 갤러리의 ‘숭고-헤테로토피아 공간’으로 전시를 이어가며 디지털 책을 보는 관객에게 그 내용을 읽어주기도 하는 등의 공감각적 향유 방식으로 책 안에 담긴 시간성과 인류사를 관통했다. 그간 숭고한 존재로 접근했던 책을 여성문제를 통해 ‘숙고’의 대상으로 반추하면서 역사가 풀어야 할 과제와 역할을 되짚게 했기에 향후 이어갈 작가의 행보가 더욱 의미심장하다.
“미술가의 역할은 ‘재현’ 이상의 ‘제언’이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동서양 구별할 것 없이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격하된 삶을 살아온 것은 풀리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여성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가 싶었지만 갈등만 고조된 가운데 팬데믹의 시대를 맞았어요. 사회적 현상과 학문적 체계가 모조리 흔들리고 있을 때 더욱 단단히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고 ‘기틀’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갤러리 시몬에서 열린 강애란 개인전 ‘숙고의 서재’ 전시 전경.
5년 이상 여성학을 깊이 연구한 강 작가에게 이화여대는 올해 초 ‘한국여성연구원’ 원장을 맡겼다. 그는 (재)현우문화재단과 손잡고 ‘이화·현우 여성과 평화 학술상’을 제정했다. 이를 기념하며 윤석남·박영숙·정정엽 등 국내 주요 여성미술가들이 참여한 전시 ‘A Larger Mind: 우리가 지나쳐 온 그녀들의 공간’이 지난 9일 이화여대 EEC 대산갤러리에서 개막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