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국회 소통관에서 상법 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또’ 강성 여권 지지자들에게 돌팔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언급했다가 사단이 났는데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은 “변화 속도가 김문수 전 경기지사보다 빠르다”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진영대결이 뜨거운 정치권에서 현 여권의 반대편에 있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한 게 곱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박 의원 역시 비판 받을 게 분명한 상황을 알면서 메시지를 내놓은 겁니다. 박 의원은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차기 대선을 “깊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욕’먹을 게 뻔한 메시지와 행보를 보이는 건 그만큼 대권 주자로서 몸을 만들겠다는 셈법일 겁니다.
당내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도 강성 친문에 ‘눈치 아닌 눈치’를 보는 와중에 박 의원이 ‘독자노선’을 걷는 다니 그 성공 여부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주민 의원 행보도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 8월 당내 유력 정치인인 이낙연 대표와 김부겸 전 의원과 함께 당 대표 선거에 나서며 당 안팎에 적지 않은 논란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저울질 하는 모습입니다.
90년생까지 의회진출..'7080'세대 의원7%→18.3%증가
20대 국회에서 9명에 불과했던 7080의원이 3배가량 늘어났으니 세대 대표성이 증가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국민의힘 역시 20대 5명에 불과했던 7080의원이 21대들어서는 1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전체적으로는 21대 300명 의원 가운데 7080의원은 55명(민주당30명·국민의힘19명·정의당3명·국민의당1명·기본소득당1명·시대전환1명)으로 18.3%를 차지합니다. 20대에 21명(민주당9명, 자유한국당 5명, 바른미래당 4명, 정의당1명, 무소속2명)으로 7%에 불과한 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최연소 국회의원 역시 20대에선 86년생인 당시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이었지만 21대에선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92년생으로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21대에는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90년)과 민주당 전용기 의원(91년)까지 90년대생도 3명으로 늘었습니다.
‘40대기수론’의 대세를 형성한 당시 김대중(왼쪽부터)의원, 유진산 신민당 총재, 고흥문, 이철승, 김영삼 의원이 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선출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직전 20대 국회에 비해 7080의원의 수가 증가한 건 분명합니다. 그럼 메시지도 그만큼 늘어났을까요. 사실 국민들이 피부로 와 닿을 수 있는 뚜렷한 세대와 시대교체 메시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70년대 생인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당권을 쥔 것과 같은 당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 논란’이 있었지만 ‘7080세대’에 이어 90년대까지를 아우르는 담론을 내놓는 정치인은 아직 없습니다.
김종인이 쏘아올린 '40대기수론'..'새인물' 갈증
김영삼'40대기수론'원조..김대중·이철승 가세로 대세 형성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8월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당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 호남권·충청권 온라인(온택트) 합동연설회에서 정견발표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김대중 자서전을 빌려 당시 상황을 옮겨봅니다.
<1970년 1월 초 신민당 임시 전당 대회가 열렸고, 유진산 씨가 총재로 선출됐다. 유진산 씨는 사쿠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성을 의심받고 있었다. 따라서 대중적 지지가 약했다. 총재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는 될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세대교체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40대 기수론’은 나도 동조하고 있었다. (중략) 당내에서는 40대 후보로 자연히 세명을 지목했다. 김영삼, 이철승, 그리고 나였다 문제는 유총재였다. 유총재는 40대 기수론을 잠재우려 직격탄을 날렸다. “구상유치의 정치적 미성년자들이다”(중략)1970년 1월24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을 공식 천명한 후 지명대회가 있기 전까지 약 8개월 동안 열심히 전국의 대의원들을 찾아다녔다. 당원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특히 경상도에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아내도 열성적이었다. 그 때 야당 대의원들은 산동네에 많이 살았는데 아내는 케이크를 사들고 가파른 길을 올라 대의원 집을 찾아갔다. 그런 선거운동은 대의원보다 그들의 부인과 가족들을 움직였다. 그것은 다시 가족들이 대의원을 움직이는 효과로 나타났다. 나는 표를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갔다. 전당대회 전날 밤에도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가 그들의 손을 잡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재석 885명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 /2차 투표 재석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산 410표, 무효 16표. 나는 과반을 훨씬 넘어 대통령 후보에 지명이 되었다. 박수와 환호성은 그칠 줄 몰랐다. 한국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역전극이었다.>
다시 2020년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박주민 의원이 지난 8월 당 대표 출마 당시 ‘당 지도부와 사전협의가 없었다’며 똑같은 평가를 받았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박용진 의원이 잊을 만 하면 강성 여권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는 이유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국 정치에 다시 40대 기수론을 대세로 끌어가기 위해 ‘양박(박용진·박주민)’에 가세하는 다른 ‘7080경쟁자’가 필요하다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송종호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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