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해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협정문에 서명하자 박수를 치고 있다./연합뉴스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15개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15일 체결됐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과 인구의 30%를 무대로 한 세계 최대 FTA 시장이 논의 시작 8년 만에 열리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진행된 제4차 RCEP 화상 정상회의에서 “코로나의 도전과 보호무역 확산, 다자체제의 위기 앞에서 젊고 역동적인 아세안이 중심이 돼 세계 최대 규모의 FTA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어 “RCEP가 지역을 넘어 전 세계 다자주의 회복과 자유무역 질서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미중분쟁 등으로 높아진 불확실성 속에서 다자무역을 통해 경제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협정의 가장 큰 기대 효과는 관세율 완화를 통한 국내 수출기업의 경쟁력 제고다. 품목별 관세를 추가로 없애 관세철폐율이 한·아세안 FTA보다 최대 10%포인트 높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수출기업의 행정 절차도 간소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수출기업은 각기 다른 FTA 기준에 따라 원산지 서류를 준비해야 했지만 통일된 기준이 적용되면서 특히 중소기업의 행정편의가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저작권·특허·상표·디자인 등 우리 기업의 지식재산권에 대한 포괄적 보호 규범도 마련된다.
일본과의 사상 첫 FTA 체결이라는 점도 의미가 깊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중국·일본·독일·인도 등 세계 경제 상위 5개국과 모두 FTA를 맺게 됐다.
대(對)중국 무역적자를 우려한 인도는 이날 서명식에 불참했다. 다만 인도가 추후 RCEP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원국들은 기회의 문을 열어놓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세계 최대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협정문에 서명하자 박수치고 있다./연합뉴스
정부가 RCEP을 체결하면서 아세안 10개국과 상품 관세 철폐 수준이 최대 94.5%까지 높아진다. 이에 따라 현대차와 자동차부품 업계는 시장 확대의 호기를 맞게 됐다. 아울러 이번 협정으로 일본과 최초의 FTA를 맺은 셈이 돼 침체된 양국 관계 개선의 디딤돌이 될지 주목된다.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에 이은 코로나19 사태로 보호무역 기조가 거센 가운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메가 FTA로 자유무역의 저지선을 구축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RCEP 체결로 아세안 상품시장이 추가로 개방된다. 지난 2007년 발효된 한·아세안 FTA 관세철폐율(79.1∼89.4%)보다 품목별 관세를 추가로 없애 관세철폐율을 국가별로 91.9∼94.5%까지 끌어올렸다. 품목별로 보면 인도네시아·필리핀·태국 등은 안전벨트·에어백·휠 등 자동차부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자동차부품에 대해 최대 40%의 관세를 매겼으나 이를 없앴다. 현대차가 인도네시아에서 완성차 공장을 건설 중인 가운데 자동차부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되면 현지 경쟁력을 높이면서 국내 부품 업체의 수출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국가에서는 화물차나 소형차에 대한 관세도 철폐됐다.
RCEP는 또 참여국과 개별적으로 맺은 원산지 기준을 통일해 양자 FTA 체결 때 발생하는 이른바 ‘스파게티 볼’ 효과를 최소화했다. 스파게티 볼 효과는 접시 안에서 얽히고설킨 스파게티 가닥처럼 나라마다 다른 원산지 규정과 통관절차 등으로 기업이 FTA 혜택을 받기 어렵게 되는 상황이다. 예컨대 기존에는 중국·호주에 세탁기를 수출하려면 원산지 기준이 제각각 달라 어려움을 겪었지만 RCEP 체결로 기준이 하나로 통일돼 기업 편의성이 높아진다.
또 RCEP 참여국 전역에서 재료를 조달·가공하더라도 원산지 누적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기존에는 한국이 중국에서 재료를 수입해 호주로 수출하면 한국 물량만 원산지로 인정했지만 앞으로 중국 물량도 원산지 누적으로 인정돼 관세 인하 혹은 철폐 혜택을 기업이 받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RCEP를 통해 일본과 최초의 FTA를 체결하면서 양국 간 무역장벽을 낮췄다. 최근 한일관계가 역대 최악의 수준인 데 관계개선과 협력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다만 경제효과가 단기에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협정에서 한일 간 관세 철폐 수준(품목 수 기준 83%)은 중국·호주·뉴질랜드(91~100%)는 물론 아세안에 비해서도 크게 낮기 때문이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업계와의 협의를 통해 완성차·기계 등 주요 민감품목은 개방 대상에서 제외했다”면서 “육성이 필요한 소재·부품·장비 품목은 개방을 제외하거나 열어도 20년 이상 장기로 관세를 낮추게 된다”고 말했다.
RCEP 체결로 코로나19 이후 불투명한 무역환경이 개선되는 점은 국내 경기반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인도가 불참하더라도 상품 관세 감축에 따라 한국의 실질 GDP가 0.51% 증가하고 소비자 후생은 약 54억7,600만달러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서비스시장 개방 등 추가적인 무역자유화와 원산지 규정 조화 등을 통한 비관세장벽 완화를 추가적으로 고려하면 우리 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로 확산하는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억누르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자국 우선 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위기를 겪는 다른 나라들도 무역장벽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에 조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보호무역 정책을 당장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RCEP는 각국으로 번져가는 보호무역 흐름이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방어벽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세민 기자,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