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 ‘워크 더 라인(Walk the Line)’ 전시 장면. 에르메스코리아는 후원회 ‘세마인’을 통해 10년간 미술관을 후원하기로 했다.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
“한 움큼씩 모은 마음을 미술관으로 확장하면, 우리가 원심이 된 파장이 퍼지고 울려 다시금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SeMA)의 영문 약칭을 빌어 이름 지은 미술관 후원회 세마인(SeMA 人)의 이사장인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발행인 겸 백남준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앉은 이사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세마인은 서울시립미술관을 후원하고자 지난 2014년 3월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민간단체다.
이영혜 서울시립미술관 후원회 세마인 이사장이 11일 열린 이사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조상인기자
지난 11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비공개로 열린 세마인 이사회는 미술관 로비에서 성대하게 열리던 예년 ‘세마인의 밤’과는 달리 단출했다. 코로나 여파로 상반기에 열려던 이사회를 조촐하게라도 열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눈치였다. 대신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가 이날의 특별손님으로 주목을 끌었다. 한국 구상조각의 별 같은 존재였으나 짧게 생을 마감한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조카다. 수년 전 권진규미술관 건립을 목표로 새 주인에게 갔던 권진규 작품과 기록물 700여 점이 대부업체 담보로 잡혔던 것을 가까스로 되찾아 온 허 대표는 최근 작품과 기록물 일체를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작품 인수에 적잖은 자금이 필요하기에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고육지책으로 오는 25일 열리는 케이옥션 경매에 8점을 내놓기로 했다. 허 대표가 권진규의 일생을 대표하는 조각 10점을 소개하는 동안 후원회 이사들은 경매 도록을 보며 출품작을 살폈다. 제1대 세마인 이사장으로, 전주대와 계원예대 총장을 지낸 이남식 서울예대 총장이 “일본의 미술 명문인 무사시노 미술대학이 개교 80주년을 맞아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꼽은 권진규였다”고 강조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 관장을 지내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대표를 역임한 이사회 원년 멤버 김홍남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내셔널트러스트가 유족의 기증을 받아 문화유산으로 보전한 첫 사례가 권진규의 동선동 아틀리에”라고 덧붙였다. 이날 이사회는 권진규를 서울시립미술관 후원회가 연구·학습할 ‘2021년의 작가’로 선정했고 유작 기증을 지원할 방안, 동선동 아틀리에 탐방 등의 일정을 논의했다.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가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세계에 대해 서울시립미술관 후원회 이사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조상인기자
밀알이 모여 시작된 후원회 ‘세마인’이 미술관 후원의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간 미술관·박물관 후원회는 기부금을 거둬 소장품 구입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세마인은 후원회 이사들에게서 돈을 걷지 않는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미술관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유인책을 모색한다. 지난 연말에는 에르메스 코리아와 손잡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에르메스 남성복 패션쇼를 개최해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못지않게 북적이는 인파를 모았다. 기업 및 개인의 금전적 후원을 받더라도 미술관 사업과 연계시키고, 후원 경매를 통해 기금을 마련하는 식이다. 지난해부터 10년간 10억 원을 미술관에 후원하기로 한 에르메스 코리아는 격년제로 공간조성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을 지낸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을 이사로 둔 세마인은 ‘세마(SeMA)-하나 평론상’과 ‘미디어아트어워드’를 제정해 매년 번갈아 수상자를 발표한다. 평론과 미디어아트라는 미술계의 소외된 영역을 적극 지원해 눈길을 끈다. 2015년부터 시작한 ‘사진아카데미’는 수강료의 20%를 세마인 후원금으로 자동기부하고, 매해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사진 아카이브로 남긴다는 의미도 있어 일거양득이다. 김태성 세마인 사무국장은 “디자인업체 시디즈가 개발한 ‘뮤지엄 체어’를 기증받은 것이나 까르티에, 블룸버그 등 기업과 VIP프로그램을 진행해 미술관 애호인의 저변을 넓히는 등 기금 마련이 목표가 아니라 명분을 쌓으며 미술관을 함께 만드는 지속 가능한 후원조직이 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지원금보다도 미술관의 역할과 위상,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해 후원보다 후원회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서울경제DB
국립현대미술관 후원회(MDC)도 서울관 개관 이후 조직을 정비해 2018년부터 적극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희경 국립현대미술관문화재단 사무국장은 “미술관이 소장한 유무형의 콘텐츠를 더 널리,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하는 것도 재단과 후원회가 하는 일”이라며 “소장품 확보도 미술관 요청과 후원회 제안이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목표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미술애호와 미술관 방문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후원문화’는 공립미술관이 아닌 비영리 예술단체로도 확산되고 있다. 비영리문화공간 ‘통의동 보안여관’은 최근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하고 일종의 후원회원인 ‘보안손님’ 모집을 시작했다. 최성우 보안여관 대표는 “14년간 운영하며 확보된 지지층이 탄탄하기에 서점과 게스트하우스 이용 등의 혜택부터 후원금에 대한 기부영수증 처리도 제공하고자 한다”면서 “보안여관의 전시, 교육프로그램은 공적 영역인 만큼 ‘보안손님’에 맞춘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정체성과 지향점을 보다 명확히 하고 내용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보안여관 측은 ‘보안손님’을 위해 미술사 교육을 비롯해 오프라인 매거진 서비스 등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아직 갈길 먼 우리나라의 미술관 후원 및 기부 문화가 확고히 뿌리내리려면 제도 개선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세제혜택 등의 유인책이다.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정책 연구자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후원자를 위한 특별한 관람기회와 교육도 필요하지만 미국, 유럽 수준의 세제혜택이 절실하다”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한 유인책으로 세제혜택을 제공해 개인의 재산을 공공의 자산으로 바꿔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