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1967년 파운드화 평가절하

英경제 약화로 지속 하락


“파운드화의 가치를 14% 평가절하합니다. 잉글랜드 은행의 할인율도 8%로 인상하겠습니다.” 1967년 11월18일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가 발표한 ‘금융대책’의 골자다. 미국 달러화에 대한 파운드화 환율은 이에 따라 2.80달러에서 2.40달러로 떨어졌다. 윌슨 총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강조했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토요일 밤 9시30분에 발표했지만 생활물가부터 치솟았다.

윌슨 총리와 제임스 캘러헌 재무장관의 처방은 노동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13년 장기집권을 누리던 보수당을 3년 전에 제쳤으나 물려받은 곳간은 텅 비고 빚(재정적자 8억파운드)만 남은 상태. 임금 동결과 단계적 금리 인상으로 물가 방어를 시도했으나 반짝 효과에 그쳤다. 결정적으로 3차 중동전쟁이 악영향을 끼쳤다. 1967년 6월 발발한 전쟁으로 수에즈 운하가 막히고 부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통에 가뜩이나 바닥이던 각종 지표가 더 나빠졌다.


실업이 전쟁을 전후해 한 달에 1만명씩 늘어나며 56만명 선을 넘었다. 월평균 4억파운드를 유지하던 수출은 오히려 3억5,000파운드로 내려앉았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단기자금 유출. 중동전 여파로 미국이 고금리 정책을 취하며 영국 돈이 빠져나갔다. 미국과 영국이 지배하는 국제금융질서에 반감을 표시해온 프랑스는 금(金)에 대한 투자를 늘려 달러화와 파운드화의 약세를 부추겼다.

윌슨 내각이 미국과 협의 끝에 단행한 평가절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을까. 그렇지 않다. 1967년 2.2%였던 물가 오름세가 1970년에는 6.1%로 올랐다. 야당인 보수당은 “영국이 무너지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국 1970년 노동당은 정권을 잃었다. 국제금융도 파란을 겪었다. 금값과 주요 통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국제 풀(pool)이 1968년 3월 깨지고 1971년에는 미국이 달러화 금 태환을 포기하며 스스로 통화가치를 떨어뜨렸다.

미국 건국 이래 4달러 후반대였던 파운드 환율은 남북전쟁기에 한때 9.97달러를 기록하며 최고점을 찍은 이래 하향 일변도다. 영국 경제가 그만큼 약해졌다는 방증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통화의 가치도 오르지만 한국은 예외다. 1960년 공식환율은 1달러당 150원, 1979년 10·26사태 때는 450원,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은 770원이었으나 요즘은 1,110원대를 오간다. 원화의 구매력은 왜 떨어졌을까.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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