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마리 앙투아네트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평온해요.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는 게 안타까워요.” 1793년 10월16일 새벽 4시30분쯤 프랑스의 ‘마지막 왕비’로 불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에게 쓴 편지는 인생이 덧없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이날 정오 무렵 프랑스대혁명의 혁명정부가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남편 루이16세가 같은 해 1월 처형된 데 이어 38세 생일을 약 2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앙투아네트는 왕비로 화려한 삶을 살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는 14세에 프랑스와의 결혼동맹을 위해 왕세자 루이16세에게 시집 보내졌다. 이어 프랑스 왕이 천연두로 죽자 그는 10대의 나이에 프랑스 왕비가 됐다. 왕위에 오른 루이16세는 선량했지만 우유부단해 개혁에 실패했고 입헌군주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혁명의 불길이 프랑스 전체를 뒤덮었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경쟁국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혼외정사·동성연애설과 그의 아들이 다른 남자의 소생이라는 설 등 악의적 소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중에 상당 부분이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왜곡된 것으로 재평가됐다. 앙투아네트가 세상 물정을 몰라 한 얘기로 알려졌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라’는 말도 실제로는 그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앙투아네트가 왕비였을 때 재정이 파산할 지경이었으나 그의 사치 때문만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 때문으로 분석된다.

최근 앙투아네트의 흰 미들힐 구두 한 짝이 프랑스에서 진행된 온라인 경매에서 4만3,750유로(약 5,760만원)에 낙찰됐다. 염소 가죽과 실크로 만들어진 이 구두는 앞코가 해지고 여기저기 구겨져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구두는 앙투아네트 시녀의 친구를 통해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200년이 훌쩍 지나 경매에 나왔다. 앙투아네트의 구두가 프랑스대혁명의 격동과 진실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오현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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