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환 농협은행장
코트 차림에 테이크아웃 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낙엽이 쌓인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걷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에는 왠지 LP와 턴테이블이 잘 어울린다.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 요즘 세대들에는 생소하겠지만 20세기에 사람들은 주로 LP로 음악을 들었다. 지난 1980년대에 CD라는 디지털 음원 매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 방식의 물건들을 수없이 대체해왔고 음반시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 LP의 멸종을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듯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오히려 LP 판매량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올 상반기 미국에서 LP 관련 매출이 CD를 앞질렀다는 깜짝 놀랄 만한 CNN의 보도가 있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LP보다는 CD의 멸종 가능성이 더 높다.
LP 애호가들은 LP의 매력을 ‘소리가 따뜻하다’는 말로 설명하곤 한다. 골수팬들은 턴테이블을 진공관 앰프와 매칭해서 시각적인 따뜻함까지 추구한다. LP로 음악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불편한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편함이 음악에 더욱 집중하게 해준다. ‘아날로그의 반격’의 저자 데이비드 색스는 “인간은 물리적인 존재이며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만져볼 수도 있다는 것은 스트리밍 방식과 분명히 차별화되는 LP만의 매력이다.
은행산업에도 현금자동지급기(CD)가 있다(음반산업의 CD와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다). 우리나라에는 1975년 8월에 처음 도입됐다. CD기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이 기계가 은행원을 빠르게 대체할 것이며 결국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통한 앱뱅킹 서비스가 보편화된 지금, 시중은행은 CD기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차츰 줄여가고 있다. 어쩌면 음반시장에서처럼 CD기가 은행원보다 먼저 멸종할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사라질 대표적인 직업으로 은행원이 주로 거론되고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로 은행산업에 대한 우려가 많다. 과거 이동통신사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출현 이후 데이터사업자로 변모해 고유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은행도 업(業)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디지털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발전해야 한다. 은행의 신용과 신뢰는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하며 자산관리와 기업금융은 비대면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은행업의 고유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의 은행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신속성과 간편성을 추구하는 고객의 니즈에 부합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LP가 스트리밍과 CD와의 경쟁에서 꾸준히 살아남은 것처럼 은행 서비스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 고객이 어디에 있든(온·오프라인) 어떤 콘텐츠를 이용하든(LP·CD·스트리밍) 중요한 것은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명반)를 제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