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제일 뿐 나는 우승할 선수다’ 이 믿음 하나로 버텼죠”

‘여자골프 2020년의 발견’ 안나린 인터뷰
2017년 KLPGA 투어 데뷔했지만 신인상 자격도 못 얻어
데뷔 4년 차 가을에 한 달 새 2승…상금 4위, US 女오픈 출전
중2 때 입문한 늦깎이, 김효주·고진영이 동기생
“쟤들이 하면 나도 못할 것 없어”…우승 없지만 연습벌레로 주목
“정신력 강한 선수, 성실한 선수 평 받으며 큰 무대서 롱런하고파”

데뷔 두 번째 우승 뒤 트로피에 입 맞추는 사진을 들고 환하게 웃는 안나린. /오승현기자

서울 강남구의 골프의류업체 보그너 빌딩 외벽에는 ‘안나린 프로의 우승을 축하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안나린(24·문영그룹)의 우승 사진이 들어간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지난 18일 이곳에서 의류후원 관련 행사에 나선 안나린은 “(너무 큰 현수막이) 쑥스럽기도 한데 자랑스럽고 감사한 게 먼저”라며 웃었다.

안나린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2020시즌 최고의 발견으로 꼽힐 만하다. ‘천재골퍼’ 김효주, 72홀 국내 최소타 신기록 보유자인 박현경과 함께 다승 공동 1위(2승)에 올랐다. 골프천재로 불린 적도, 신기록을 세운 적도, 심지어 국가대표나 상비군 경험조차 없는데도 타이틀 경쟁이 절정이던 가을에 데뷔 첫 승과 두 번째 우승을 한 달 새 몰아쳤다. 우승상금으로 자동차를 사고 싶다던 안나린은 “인터넷으로 부지런히 고르고 있다. 2~3개로 후보를 좁혔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건물 현수막의 안나린 이름 앞에는 ‘인내로 피워낸 꽃’이라는 수식어가 눈길을 끈다. 그는 3년 넘게 우승 없이 매년 상금순위 30~40위권에만 머무는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다. 1996년 1월생으로 1995년생들과 친구인 안나린은 정규투어 데뷔도 동기들보다 3년이나 늦었다. 2015년 한 대회에 월요예선을 거쳐 출전한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정식 데뷔한 2017년에 신인상 자격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안나린은 막판 상금왕 경쟁 끝에 4위에 오르는 등 투어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작년 이맘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자신감부터 많이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인내의 시간은 3년보다 훨씬 길었다. 중학교 2학년 가을에 골프에 입문한 늦깎이인 안나린은 김효주·고진영 등 같은 학년 간판들에게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다. 주니어 시절 우승 경력도 없다. 대신 누구보다 성실한 선수로 종종 거론되곤 했다. 학생 때 코치가 다른 동료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나린이가 타석에서 내려올 때까지 내려오지 마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골퍼들은 보통 장갑을 끼는 왼손보다 오른손이 검게 햇볕에 그을리는데, 안나린은 장갑을 벗고 하는 퍼트 연습을 워낙 많이 해서인지 양쪽 손등이 거의 똑같이 까맣다. 실외 연습을 끝내고도 방에서 퍼터를 놓지 않았다. 안나린은 “퍼트의 직진성을 높이려고 가운데로 통과해야만 하는 기구를 가져다 놓고 그냥 숙제하듯이 퍼트 연습을 했다”고 돌아봤다. 중3 때 처음 나간 대회에서 90타-90타를 쳤던 안나린은 1년도 안 돼 이븐파를 쳤다. 우승이 없어서, 이름난 친구들보다 주목을 못 받아서 조바심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안나린은 “저 스스로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힘줘 말했다. “잘 하는 친구들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제가 할 것만 해나가면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쟤들이 하면 나도 못할 것 없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정규투어 와서도 힘들 때가 있기는 했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나는 우승할 선수’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몸통과 일체감이 없는 백스윙 때문에 아이언 샷 거리를 못 맞추는 문제를 거의 1년에 걸쳐 교정한 다음에는 생각보다 너무 수월하게 첫 우승이 찾아왔다. 지난달 첫 우승 때는 3라운드에 2위 고진영을 무려 10타 차로 따돌리며 독주한 끝에 최종일 4타 차 정상에 올랐고, 지난 8일에는 투어 최대 우승상금(3억원)이 걸린 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챔피언 조 경쟁을 벌여 3타 차로 또 넉넉하게 우승했다. 세계랭킹 1위 선수를 10타 차로 밀어냈던 지난달 대회 3라운드 때는 백스윙에 대한 불안감이 전혀 없이 “그저 들었다가 내리면 원하는 대로 갔다”고 한다. 춥고 바람불고 그린 난도도 엄청났던 이달 대회 마지막 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경기력을 보이고부터는 ‘돌부처’라는 마음에 드는 별명도 얻었다며 뿌듯해했다.

세계랭킹 상위 자격으로 최고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12월10일부터 나흘간 휴스턴) 출전권도 얻었다. “초등학교 때 골프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정적인 운동 같아서 싫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중2 때 해외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뒤로 외국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을 굳혔거든요.” 그 뒤로 안나린은 TV 중계를 챙겨보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진출의 꿈을 키웠다. 오전9시부터 오후6~7시까지 연습볼을 쳤다. “처음 가는 미국 대회에서 제 위치를 정확히 알아온다면 그걸로 만족이죠. 나중에 진짜 진출하기 위한 준비단계니까요. 정신력이 강한 선수, 성실한 선수라는 평을 받으며 큰 무대에서 롱런하는 게 꿈입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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