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철원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연구위원
돈을 꺼내 쓰는 것은 모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은퇴시기가 가까워지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 ‘목돈을 어떻게 꺼내 쓸 것인가’다. 가진 재산이 무한정이라면 인출하는데 별로 고민이 없을 것이다. 이런 행복한 처지가 아니라 해도 내 수명만 정확히 안다면 돈을 어떻게 꺼내 쓸까 하는 결정이 훨씬 쉬울 것이다. 가진 돈이 1억 2,000만 원이고 내 수명이 10년 남았다면 매달 100만 원씩 쓰면 딱 맞아 떨어진다. 문제는 자기 수명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물가상승률도 계산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위 사례에서, 한 달 100만 원이라는 액면은 같아도 지금과 10년 후의 가치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매번 물가상승률만큼 올린 금액을 인출해야 삶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금리는 낮아지고 평균수명은 늘어나는 추세를 고려하면 인출 조건은 열악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인출액을 낮추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투자를 통해 일정 수준의 수익률을 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윌리엄 벤젠이라는 재무설계사는 ‘4%룰’이라는 인출 방식을 고안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첫 해 잔고의 4%를 꺼낸다. 다음 해부터 4%에 그동안의 물가상승률을 더한 비율만큼을 인출한다. 이런 식으로 돈을 꺼내 쓰면 적어도 33년은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는 예금에 맡겨서는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자금 고갈 시기가 훨씬 빨리 올 것으로 예측했다. 따라서 미국 주식과 국채에 절반씩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만약 연평균 5%의 투자수익률을 달성했고 물가상승률은 3%였다면 33년 후 잔고는 바닥난다. 목돈 3억 원이 있다면 60세부터 93세까지 매달 100만 원을 쓸 수 있는 셈이다. 만약 물가상승률이 지금처럼 1%라면 매달 125만 원을 인출해도 97세까지 버틸 수 있다. 여기에 투자수익률을 6%로 올릴 수 있다면 매달 150만 원을 92세까지 인출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물가상승률이나 투자수익률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투자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금을 이자율 1%에 불과한 예금에 둔다면 물가상승률 1%, 월 100만 원 인출을 가정했을 때 잔고는 85세에 바닥난다. 인출액을 월 75만 원까지 줄여야 93세까지 버틸 수 있다. 벤젠도 투자비중이 높을 때보다 지나치게 낮을 때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다.
사실 자금의 고갈 시점을 자기 수명과 일치시킨다면 가장 이상적인 인출 계획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수명은 사전에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인출 방식은 오직 보험에만 있다. 문제는 평균수명이 급속히 늘면서 연금보험의 지급액이 크게 줄었다는 데 있다. 다음번에는 이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