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조급했다. 바이올린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무수한 시간들. 그러나 앞에 앉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성적순으로 줄 세워 앉히는 오케스트라의 맨 뒷자리, 채송아(박은빈)는 그 자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천재가 될 수 없었다.
음계가 맞고 틀릴 수는 있어도, 음악에 순위가 있을 수 있을까. 좋아해서 하는 음악은 나보다 오래한 사람, 그리고 타고난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었다. 대학원 진학과 여기까지의 경계에 선 그녀에게 오늘 공연을 앞둔 지휘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가라고, 그럼 꼴찌를 하지 말던가.”
채송아라는 이름을 죄송하다고 알아듣는 지휘자에게서 벗어나 그녀는 홀로 우두커니 서서 오케스트라와 박준영의 음악을 들었다. 눈물이 났다. 그가 쏟아내는 음악이 너무 뜨거워서, 내 안에 담긴 것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그는 어디에서도 천재였고, 선생님으로 불렸다. 2013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자 없는 2위로 입상한 뒤 어디를 가든 박준영(김민재)은 사람들에 둘러싸였다. 실력만큼 잘생긴 외모로 공연마다 관객이 몰려들었다. 화려했다. 무대에서는 항상 스포트라이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러나 환한 무대를 벗어나면 대기실까지 이어진 어두운 통로처럼, 드러나지 않은 그의 삶은 언제나 답답하고 암흑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성공은 정경의 불행 값이었기에, 성장할수록 그녀가 받을 상처에 웃어도 웃을 수 없었다. 밤새 그를 생각하다 이른 아침 트로이메라이를 치고 나면 마음이 조금 덜하기도 했다. 일년간의 안식년을 갖기 전 마지막 연주에서 정경을 만난 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연민일까. 한국으로 돌아온 그 앞에서 채송아는 말한다. 다른 사람 말고 준영씨의 연주는 어떠셨냐고. 리허설룸에서 들은 트로이메라이, 그날 연주를 떠올리면 뭔가가 여길 건드린다고….
좋아하기에 끝을 망설이는 그녀와 천재이되 마음 둘 곳 없는 그는 친구가 된다. 짝사랑에 상처받은 그녀에게 들려준 월광에 이은 생일축하곡. 그 연주는 그녀에게 보내는 것이되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음악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지만, 언제 위로받았는지 떠올리지 못하던 이들에게 잠깐의 진심어린 연주는 서로에게 따스한 온기로 다가왔다. 스물아홉, 불안의 끝에서 20대의 마지막 계절을 보내는 이들은 조금씩, 느리게, 조용히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위로받고 싶은 순간, 웃고 싶을 때 그가 그녀가 생각났다. 보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감정이 커지면서 ‘이것이 진짜 사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좁혀지는 거리만큼 현실적인 벽은 두꺼워져만 갔다. 자신의 가정환경과 자신과 얽힌 이들의 이야기를 차마 꺼내놓기 힘든 그와, 온전히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그녀의 오해는 뜻하지 않게 꼬여가기만 했다. 차마 대학원 시험에 반주를 부탁할 수 없는 송아와 해준다고 말을 꺼낼 수 없는 준영의 이야기는 여우비처럼 맑은 날 잠깐 내리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듯 했다.
우산,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우산이 되어주고 싶었다. 대전에서 우연히 만난 엄마의 식당에서 너무나 기쁘게 먹고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차마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아버지 이야기를…. 그녀는 그런 그가 고맙다.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손을 꼭 잡는 그들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비친다.
사랑의, 이들의 성장의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트로이메라이. 유태진 교수가 훔쳤던 이 곡을 두고 채송아는 ‘준영씨 마음을 따라간 연주’라며 “앞으로도 준영씨 마음을 따라가는 그런 연주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항상 잘 해야만 했던, 누군가에게는 10점이 아닌 모두에게 8점을 받아야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그는 답한다. 피아노를 치며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때가 더 많았을지 모르겠다고. 송아씨랑 함께 있었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고. 그걸 이제 알았고, 그래서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고.
크레센도. 점점 더 크게.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가 가장 작다는 뜻. 지금이 제일 작아야 앞으로 커질 수 있는 거니까. 내가 제일 작은 순간이 바꿔 말하면 크레센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바이올린을 그만두는 채송아의 새 출발도, 항상 우승자가 돼야 했던 과거와의 작별을 앞둔 박준영도 졸업 연주회 무대에 올라 후회없이 연주하며 ‘크레센도’ 그 순간에 선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 하지만 때로는 굵직한 선택과 마주해야 하고, 또 포기해야 한다.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나를 찾아야 한다. 스물아홉, 경계에 선 청춘은 이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온기를 맞대며 선택하고 포기하며 지나온 것보다 훨씬 많이 남은 이야기를 함께 풀어내려 한다.
“그날 무슨 소원을 빌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사람 덕분에 나는 상처받고 또 상처받더라도 계속 사랑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계속 꿈을 꾸고 또다시 상처받더라도 내 온 마음을 다해 다시 사랑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