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 담벼락에 붙은 두 장의 대자보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대 재학생이 쓴 대자보는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철도 노동자 직위 해제 등으로 점철된 수상한 시절을 언급하며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안부를 건넸다. ‘안녕’이라는 화두는 평온해 보였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한동안 대학가에는 정치·사회적 현안을 다룬 릴레이 대자보 열풍이 불었다.
그 해 ‘국민 대통합’을 내걸고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국가기관 대선 개입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총수의 신상을 털어 중도 하차시켰다. 종북 세력을 척결하겠다며 헌정 사상 처음 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했으며 국정 교과서 채택을 놓고 ‘좌파와의 역사 전쟁’이 펼쳐지기도 했다. 법치를 앞세워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옥죄고 권력을 사유화했던 당시 정권은 지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다. 촛불의 힘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 정권이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으로 꼽는 여러 행태가 민주화 세력을 대변한다는 현 정권에서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그때 그 장면이 재생되고 있다.
지난해 말 대한민국을 뒤흔든 ‘조국 사태’는 ‘최순실 사태’와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깊은 배신감을 안겼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라 외쳤으나 불평등한 운동장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 약속했지만 ‘아빠 찬스’를 내세워 남의 집 자식들을 불공정한 게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결과는 정의롭지 못했고 염치는 땅에 떨어졌다. ‘조국 퇴진’ 구호가 터져 나왔고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6년 만에 같은 자리에 등장했다.
앞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단 살포 등을 하면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해진다. ‘좌파와의 역사 전쟁’이 있던 자리에 ‘우파와의 역사 전쟁’이 들어섰다.
추·윤 갈등은 현 정권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발단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였다.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에게는 ‘적폐’라는 낙인이 찍혔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앞세워 현직 검찰총장을 ‘식물총장’으로 만들더니 급기야 징계를 밀어붙이고 있다. 법원과 감찰위원회가 위법·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도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지지율 급락으로 조급해진 대통령은 ‘연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출범’까지 못 박았다. ‘어명’을 받아 든 민주당은 절차와 형식을 무시한 채 공수처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 야당 몫에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를 앉혔고 낙태죄 공청회를 빙자해 공수처법을 기습 처리하는 ‘꼼수’까지 썼다. 군사작전 펼치듯 일사천리로 통과시킨 현란한 날치기 솜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헌법에 근거도 없고 견제 장치조차 없는 기형적인 ‘괴물’을 만들어 걸림돌을 치우겠다는 섬뜩한 결기마저 엿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경고음이 계속 울리는데도 이를 뭉개고 심지어 개혁의 명분으로 삼는 ‘민주화 세력’이다. 법치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의를 외치면서 자기편만 챙기는 ‘선택적 정의’를 일삼고 있는 ‘일그러진 영웅들’이다. 이들은 이 나라가 선거 승리의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 ‘법의 지배’는 ‘법에 의한 지배’로 대체됐다.
민심은 지지 철회를 통해 일그러진 영웅들에게 경고장을 보내고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이대로면 시민들이 피의 대가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몰락은 필연이다. 2013년의 대한민국이 2020년의 대한민국에 묻는다. “그래서,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우리는 과연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