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차기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선두로 올라서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지지율은 답보 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구원투수로 대선 과정에 뛰어들 수 있음을 암시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2심 유죄 판결 이후 확실한 ‘친문’ 대권 주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이른바 ‘86(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세대’의 대표주자로서 어떤 역할이든 맡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정권이 교체되든 되지 않든 문재인 대통령의 계파적 철학을 다음 정부에서도 계승하기 위해 이 장관이 직접 대권 주자로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애초부터 일각에서는 그가 민주당 원내대표에서 국가의전서열을 낮춘 통일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부터 차기나 차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행보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 바 있다.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이낙연 대표에 대한 지지세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친문 진영과 호남 표밭을 두고 정세균 국무총리, 추미애 법무부 장관, 임종석 대통령 외교안보특별보좌관, 이광재 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이인영 장관도 경합을 벌일 수 있다는 진단이다.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이인영 “정권 재창출에 나를 던져서 해야 할 일 할 것”
이 장관은 지난 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최근 민주당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데 대한 생각을 묻자 “내년은 정권 재창출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면서 “제가 정당 정치인 출신으로서 저를 던져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남북관계를 푸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다른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내년 대선 관련 활동에 뛰어들 여지는 분명하게 남긴 것이다.
이 장관은 이어 진행자가 “상황이 닥치고 당을 위해 정권 창출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장관으로 갈 때 희생했듯 또 나를 던질 수 있다는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이냐”고 묻자 “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 저를 던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며 “남북관계를 풀고 한반도 평화를 확고하게 만드는 데 저의 소명이 다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첫 의장 출신인 이 장관은 임종석 특보, 우상호 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 운동권 그룹 가운데서는 이름을 상당히 널리 알린 축에 드는 정치인이다. 정치적 스승으로 모신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만큼 지금까지도 ‘김근태(GT)계’로 분류된다. 친문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전대협 등 운동권 출신이 주류인 친문 계열에서도 거부감이 적은 인사로 꼽힌다.
그는 서울 구로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4선 현역 의원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부터 올 5월까지는 민주당 원내대표도 지냈다.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문재인 정부의 부름을 받고 지난 7월부터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다. 당시 그는 국회의장에서 국무총리로 옮긴 정세균 총리, 당 대표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간 추미애 장관과 더불어 ‘큰 꿈’을 위해 일종의 ‘정치적 희생’을 택한 게 아니냐는 시선을 받았다.
윤석열은 수직상승하는데, 이낙연·이재명은 ‘답보’ 위기
이 장관이 언급한 ‘할 일’의 구체적 의미는 확실치 않다. 다만 ‘정치인으로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상황’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정권이 교체될 위험이 발생할 경우다.
실제로 최근 검찰개혁(?)을 둘러싼 진영 갈등과 부동산 시장 악화 등으로 문 대통령의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은 최근 30%대까지 주저앉았다. 지역적으로는 호남권, 연령별로는 40대 외에 긍정 평가를 하는 계층이 이제 전무한 지경에 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석열 총장의 인기가 수직상승 하며 차기 대권 구도에도 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난 9일 여론조사 전문 회사인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지난 5~7일 실시한 차기 대권 선호도 여론조사(응답률 6.3%. 표본 오차 95% 신뢰 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윤 총장은 28.2%의 지지율을 기록해 이재명 지사(21.3%), 이낙연 대표(18.0%)를 오차범위 바깥으로 따돌렸다. 특히 친문과 호남의 지지를 받는 이 대표의 지지도는 직전 조사보다 무려 4.2%포인트 하락했다. 같은 날 리얼미터가 국민일보 의뢰로 7∼8일 실시한 여론조사(응답률 5.4%, 표본 오차 95% 신뢰 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도 윤 총장은 25.8%의 지지율을 기록, 이 대표·이 지사(각각 20.2%)를 크게 제쳤다.
아직 대선이 1년6개월이나 남아 큰 의미가 없는 조사 결과일 수는 있지만, 추세적으로는 여권 선두 주자들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만큼은 확실한 셈이다. 이 장관의 최근 ‘정권 재창출’ 발언 역시 이런 흐름을 고려해 나왔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민주당의 ‘제3 후보군’으로 꼽히는 임종석(왼쪽) 대통령 외교안보특별보좌관과 정세균 국무총리. /연합뉴스
민주당 내에서도 커지는 ‘친문 제3 후보론’
최근 민주당 내에서 ‘제3 후보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핵심 친문 인사로 꼽히는 홍영표 민주당 의원 역시 지난달 2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금의 대선 구도가 그대로 유지돼 결정 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며 “현재는 (이 대표와 이 지사) 두 분이 경쟁을 하고 있지만 상황 변화가 온다면 제2, 제3, 제4의 후보들이 등장해 경쟁할 수 있다”고 공식 발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세균 총리와 임종석 특보, 이광재 의원 등을 거론했다.
친문 진영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제3 후보가 나올 경우 가장 먼저 공략 대상이 될 기존 후보는 이낙연 대표로 지목된다. 이재명 지사의 경우 문 대통령과는 국정철학과 계파가 근본부터 달라 지지층 또한 상당 부분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경우 전라도 원적자로 대변되는 민주당 전통 지지자들을 기반으로 갈 데 없는 문 대통령 열혈 지지층과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는 평이 우세하다. 만약 제3 인물에게 친문 지지층의 표심이 갑자기 쏠린다면 이 대표의 지지율 그래프도 꺾일 공산이 크다는 게 정치권의 계산이다. 이 경우 어차피 당적이 민주당이기만 하면 ‘될 사람’에게 전략적으로 지지를 몰아주는 호남 원적자들의 특성상, 상승 곡선을 탄 후보가 이들의 표심까지 쓸어담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변수는 있다.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이다. 만약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할 경우 이 대표는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만, 참패할 경우 이 대표는 대세론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내년 정치권 상황에 따라 이인영 장관에게도 기회는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얘기다.
1987년 11월 이인영 당시 전대협 1기 의장이 대구 두류공원에서 열린 영호남시민 결의대회에서 “젊은 세대부터라도 지역감정을 해소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운동권 경력은 ‘양날의 검’... 중도층 거부감은 부담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 이 장관이 대선에 직접 후보로 참전할지, 유력 후보의 주요 참모로 투신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장관 스스로도 장관직을 내려놓고 본인까지 나서야 할 정도로 정권 재창출에 경고등이 켜지지는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강조했다.
다만 그가 직접 구원투수로 나설 경우 중도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는 성패의 최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유리한 요건은 그가 캐스팅 보트 지역인 충북 충주 출신이라는 점이다. 민주당 내에서 급격한 계파 쏠림을 보이지 않았고 원내대표 시절 의외로 비교적 유연한 자세를 보인 점도 강점이 될 수 있다. ‘86세대’를 요직마다 중용하고 정책적으로 거의 어긋남이 없이 손발을 맞춰 온 문 대통령의 후계자로 ‘86세대’가 언젠가 반드시 직접 리더로 나올 가능성이 큰데, 이 경우 이 장관은 임종석 특보와 함께 그나마 국민적 인지도가 가장 높은 인물에 속한다.
그의 최대 정치적 자산인 20대 시절 민주화·통일·학생 운동 경력은 ‘양날의 검’으로 꼽힌다. 운동권 출신이 많은 친문 진영에 이념적 믿음을 주는 데는 유리하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이후 커진 ‘86세대’ 전반에 대한 중도층의 거부감을 그대로 짐처럼 떠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 운동 외에 크게 알려진 경력 없이 30대부터 곧장 정치인으로만 살아온 만큼 ‘경제’ ‘외교’ 등 전문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과 20대 때부터 품은 가치관에 대한 신념이 아직도 강한 인사라는 평가도 지지층의 외연을 넓히는 데는 약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지난 7월 장관 지명 직후 오마이뉴스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응답률 6.4%. 표본 오차 95% 신뢰 수준에 ±4.4%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이 장관 지명에 대한 진보층의 긍정 여론은 64.2%에 달했으나 중도층과 보수층의 긍정평가는 각각 42.0%, 29.3%에 그쳤다. 이 장관에 대한 중도·보수의 거부감은 같은 시기 국가정보원장에 지명된 박지원 원장(진보층 68.0%, 중도층 48.0%, 보수층 40.6% 긍정평가)보다도 높았다. 지역적으로는 호남권과 경기·인천에서만 긍정평가가 높고 고향인 충청권을 비롯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조리 부정평가가 높아 부산·울산·경남에서도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박 원장만도 못한 성적표를 받았다. <관련기사> ▶[국정농담] 이인영이 또 소환한 '그들만의 정의·평등·공정'
북한 김정은. /연합뉴스
통일부 장관으로서 스스로 명분 마련하는 게 우선
통일부 장관으로서의 업적은 그래서 이 장관의 향후 행보에도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만약 그가 내년 초라도 백신 지원 등 보건협력을 토대로 남북관계에 새로운 물꼬를 틀거나 북한 비핵화에 진전을 이끌 경우 이는 일종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가 될 수 있다. 반면 남북관계가 교착 상태에 머물거나 더 악화된 상황에서 장관직을 마칠 경우 ‘성과도 없이 북한에 유화적이기만 한 정치인’ 그 이상의 이미지를 남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윤 총장 지지율 상승, 기존 여권 주자 지지율 하락 등의 외부 조건에 앞서 민주당 핵심 지지층은 물론 중도층까지 움직일 ‘어떤 계기’를 이 장관 스스로 마련해야만 ‘자신을 크게 던질’ 명분을 쥘 것이란 얘기다.
한편 이 장관은 꽉 막힌 대북 지원과 관련해 지난 10일 대북지원 민간단체에 대한 남북협력기금 지원 가능 횟수를 연 1회에서 연 3회로 대폭 늘리고 최대 지원 규모도 전체 사업비의 50%에서 70%로 키우는 내용의 ‘인도적 대북지원사업 및 협력사업 처리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행정예고 했다. 이달 30일까지 관련 의견을 수렴한 뒤 내년 초께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완화되는 순간부터 보건협력 등 남북 교류를 ‘통 크게’ 추진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남북협력기금으로 민간단체에 지원하는 비용의 용도는 대북지원사업에 필요한 물자·시설 자재 등 물품 구입비와 수송비, 남북한 왕래 등에 필요한 기본적 경비와 현지 활동비, 인건비를 제외한 사업관리비 등이다. <관련기사> ▶[단독] 이인영, 민간 北사업에 정부지원 한도 연 3회, 총 70%까지 늘린다
이 장관의 정치적 행보를 가를 분기점은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안보 진용이 갖춰지고 북한 김정은 정권의 새 대남·대미 전략의 윤곽이 드러날 내년 상반기가 될 공산이 크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