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마자 미국 헤지펀드인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가 LG(003550)그룹의 계열 분리에 반대하는 서한을 ㈜LG에 보냈다. 화이트박스는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 출신인 사이먼 왝슬리가 이끄는 펀드로 LG 지분 0.6~1.0%가량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화이트박스가 LG 지분을 현재로서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외국계 펀드와 연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기업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이 강행한 규제 3법의 맹점을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줄기차게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5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과 재계에 따르면 화이트박스는 LG 측에 보낸 서한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 지배 구조로 평판이 나 있는 LG가 소액주주들보다 가족을 우선시하는 계획을 제안했다”며 “LG의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다는 이유로 주주들에게 반하는 행동을 그만두라”고 밝혔다. LG가 지난달 말 주총을 열어 경영 효율화 차원에서 통과시킨 LG상사(001120)·LG하우시스(108670) 등 5개 기업을 중심으로 한 계열 분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LG그룹은 이에 대해 “이번 분사로 그룹의 역량을 전자·화학·통신 등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돼 주주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며 “분할이 완료되고 성장 전략이 더 구체화하면 디스카운트 이슈가 개선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화이트박스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김 교수는 “과거 소버린이 SK(034730)그룹을 공격하고 엘리엇이 현대자동차를 괴롭혔던 것처럼 소액주주의 이익을 명분으로 경영권에 개입하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며 “주가 상승을 노린 전형적인 헤지펀드들의 낡은 수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직후 해외 투기 자본이 국내 기업을 공격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앞으로 해외 투기 자본이 상장 기업을 먹잇감으로 공격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결국 정부가 멍석을 깔아준 셈”이라며 “국내 기업에 차등의결권·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수단을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민·맹준호기자 noenemy@sedaily.com
헤지펀드 먹잇감 된 韓기업...“상법 개정이 멍석 깔아줘”
[상법 바뀌자마자 외국 투기자본 공습]
엘리엇 출신이 이끄는 화이트박스, LG 지분 0.6% 보유
내년 3월 LG상사 등 계열분리 주총 때 주주제안 가능성
“대주주 의결권 3%로 제한...외국 펀드에 무기 쥐여준 꼴”
LG그룹에 LG상사 등의 계열 분리 반대 서한을 보낸 행동주의 헤지펀드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는 지주사인 ㈜LG에 ‘배당을 늘리고 주가를 부양하라’는 요구를 이미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는 화이트박스의 요구를 ‘기관투자가의 당연한 권리’라면서도 그들이 이번에 LG에 서한을 보낸 시기와 향후 예상되는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시 의결권을 3%로 묶는 상법 개정 입법이 추진된 시기와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정부의 상법 개정이 행동주의 펀드가 ‘행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병태 KAIST 교수는 “소액주주들을 모아 LG를 괴롭힐 수 있는 무기(의결권 3% 제한)가 생겼고 이슈(계열 분리)도 있으니 행동에 나선 것 아니겠느냐”고 평가했다. 향후 국내외 투기 자본들이 우리 기업들의 주요 의사 결정에 수시로 개입할 수 있는 판을 현 정부가 깔아줬다는 지적이다.
‘헤지펀드’ 화이트박스, 뭘 노리나
화이트박스는 지난 3년간 LG그룹 지주사인 ㈜LG 지분을 평균적으로 약 1% 보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을 공격했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 출신의 사이먼 왝슬리가 이끌고 있다. 화이트박스는 현재 ㈜LG 지분을 약 0.6% 보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펀드는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 고문이 LG상사·LG하우시스 등 5개 계열사를 떼어내 계열 분리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소액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화이트박스는 서한에서 “LG가 소액주주보다 가족을 우선시하는 계획을 제안했다”며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계속되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재계에서는 화이트박스 행보의 1차 목표를 주가 부양으로 보고 있다. 한 지배 구조 전문가는 “지배 구조와 관련한 노이즈(잡음)를 일으켜 주가를 띄우고 차익 실현을 하려는 헤지펀드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해석했다. 실제 헤지펀드들은 최근 몇 년 새 유독 삼성과 현대차(005380) 등 주요 대기업의 지배 구조 개편 작업을 타깃으로 삼아 공격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화이트박스가 단순 주가 부양에 그치지 않고 창업 4세인 구광모 LG그룹 회장 시대로 완전히 넘어가는 현시기를 공격의 기회로 삼아 내년 3월 주주총회에서 주주 제안까지 시도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LG는 내년 3월 26일 정기 주총에서 LG상사 등 5개 계열사 분할 승인을 받을 계획이다. 화이트박스가 분할 주총 때 배당 확대, 나아가 감사위원 후보 추천 주주 제안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상법상 자본금 1,000억 원 이상의 대규모 상장사는 0.5% 지분을 6개월 이상 보유하면 주주 제안을 할 수 있다.
상법 개정, 펀드에 무기 쥐어 준 꼴
문제는 화이트박스 같은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국내 기업 공격이 상시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을 도입하는 상법 개정 때문이다. 화이트박스가 LG 공격에 나선 것도 다분히 이번 상법 개정이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실제 ㈜LG의 최대 주주인 구 회장은 지분 15.9%를 확보하고 있지만 실제 감사위원 선출 때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 구본준(7.7%), 구본식(4.4%), 구본능(3.0%), 김영식(4.2%) 등 친족들의 의결권도 각각 3%로 묶인다.
화이트박스가 이 점을 활용해 지분을 3% 아래로 분산 보유하고 LG와 표 대결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제 단체의 한 관계자는 “지분율 5% 이상부터 공시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에 화이트박스에 우호적인 펀드들이 얼마나 지분을 나눠 가지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른바 헤지펀드의 ‘스텔스 공격’이 가능한 셈이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화이트박스가 감사위원 자리를 꿰차겠다고 작정한다면 LG가 아무리 표 대결에서 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LG로서는 이에 대해 상당한 방어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상법 개정을 밀어붙일 당시 재계에서 제기된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상법 개정 추진 당시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관련해 “소액주주 권익 보호가 아니라 외국계 펀드의 입김만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정부가 보호하겠다는 소액주주가 누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며 “상법 개정이 외국 펀드들만 도와준 꼴”이라고 비판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韓 대기업 노린 해외 헤지펀드들, 결국 막대한 주가차익 챙기고 떠나
[엘리엇·소버린 사태 어땠나]
헤지펀드 공격받았던 SK·현대차
경영권 방어에 모든 자원 집중
소모전에 성장동력 확보 애먹어
한국 대기업이 단기 차익을 노리는 외국계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된 사례는 부지기수다.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은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게 돼 중장기 성장 동력 확보에 애를 먹어왔다.
15일 산업계에 따르면 이날 LG그룹이 ‘계열 분리 반대’를 외친 헤지펀드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 공시 대상 기업집단 상위 5위 그룹 가운데 롯데를 제외한 삼성·현대차·SK·LG는 모두 외국계 헤지펀드의 경영권 간섭을 경험하게 됐다.
외국계 헤지펀드가 소수 지분을 쥐고 대기업을 뒤흔든 사례는 2년에 걸쳐 진행된 뉴질랜드계 자산운용사 소버린의 SK그룹 공격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소버린 사태’는 지난 2003년 3~4월 SK글로벌의 분식 회계와 최태원 회장의 구속으로 SK㈜ 주가가 폭락한 시기를 틈타 소버린이 1,786억 원을 쏟아부어 지분 14.99%를 확보한 것에서 시작된다.
소버린은 사외 이사 추천과 자산 매각, 최 회장의 퇴진 등을 요구하며 SK를 압박했다. 소버린은 경영권 장악에는 실패했지만 2년간의 지분 보유만으로 9,000억 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올렸다. SK텔레콤(017670)을 먹잇감으로 삼았던 타이거펀드(1999년), 삼성물산과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던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2004년)도 각각 6,300억 원, 380억 원이라는 차익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소버린과 맞선 SK그룹은 당시 모든 자원을 경영권 방어에 쏟아부은 탓에 2004년 한 해 설비투자가 전년보다 56%까지 감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을 받았다. 엘리엇은 지분 보유를 공개한 2018년 4월 이후 20개월간 지배 구조 개편안에 반대하고 8조 3,000억 원에 달하는 초고배당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경영권 간섭에 나섰다. 지난해 하반기 엘리엇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현대차 안팎에서는 “미래 모빌리티 기술 개발에 공들여야 할 시기에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개정된 상법 등 기업 규제 3법은 소액주주 보호와 경영 투명성 강화를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를 무력화했다”며 “기업의 성장이나 미래에 관심이 없는 헤지펀드 때문에 ‘잃어버린 몇 년’을 경험하는 곳들이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