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실리콘 힐스


1998년 3월 24일.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반도체 사업의 명운을 건 투자를 한다. 이날 열린 ‘삼성오스틴반도체사업장(SAS)’ 준공식에는 당시 텍사스 주지사였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해 축사를 했고 오스틴시는 공장 앞 도로를 ‘삼성로’로 명명했다. 삼성은 지금까지 170억 달러를 집중 투자했고, SAS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핵심 기지가 됐다.

오스틴은 1800년대 초 콜로라도 강변에 백인들이 들어와 ‘워털루’라 이름 지으며 일군 터전이다. 1839년 개척자 스티븐 오스틴의 이름을 따 오스틴으로 바꾼 뒤 도시화와 함께 텍사스의 주도(州都)가 됐다. 1883년 텍사스대 설립 후에는 행정과 교육 등 두 갈래 도시 기능을 갖췄다. 1987년부터 세계적 뮤직 페스티벌 ‘SXSW’가 열리는 등 라이브 음악의 중심지로도 떠올랐다. 그만큼 개성이 뚜렷한 젊은 인재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오스틴은 이런 환경을 기반으로 1990년대부터 정보기술(IT) 중심지로 부상한다. 특히 오스틴의 서부 구릉 지대는 첨단 기업과 스타트업이 줄줄이 들어서 ‘테크 허브’가 됐다. 미국 내에서는 실리콘밸리를 본떠서 이곳을 ‘실리콘 힐스(Silicon Hills)’라 부른다. 소득세를 걷지 않는데다 부동산 비용이 적고 높은 교육 수준의 인재가 포진하자 PC 업체 델이 이곳에서 문을 열었고 구글 등 수많은 IT 기업이 지사와 연구소를 줄줄이 세웠다. 언론들은 오스틴을 ‘미국 최고의 신흥도시’ ‘창업하기 좋은 도시 1위’ 등으로 꼽고 있다.

미국의 IT 기업들이 세금과 높은 부동산값, 노동·환경 규제에 지쳐 실리콘밸리에서 탈출하면서 실리콘 힐스와 인근의 휴스턴 등 텍사스로 향하고 있다. 올해에만 오라클 등 39개 사가 실리콘 힐스로 옮겼다. 실리콘밸리와 실리콘 힐스의 명암을 보며 우리 기업들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 3법과 높은 법인세 등 척박한 토양에서 언제까지 우리 땅에 공장을 지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국심에만 호소하며 기업에 투자를 요청하는 것은 가혹함을 넘어 몰염치한 처사다.

/김영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