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태국, 일본과 동맹 체결

1941년, 주축국 진영 합류


1941년 12월 21일 태국이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었다. 일본제 잠수함과 구축함으로 무장할 만큼 친일 성향은 짙었으나 중립을 유지하던 태국이 동맹까지 맺은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신세를 졌다. 피분 송크람 총리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흡수된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1940년 전쟁을 벌여 지상전에서 이겼다. 일본은 히틀러를 통해 비시 프랑스의 양보를 종용했다. 마침내 태국은 1941년 5월 4개 지역을 되찾았다.

둘째는 정영가도(征英假道) 요구. 진주만 기습 성공 직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까지 장악한 일본은 미얀마와 인도의 영국군을 치기 위한 태국의 지원을 요구했다. 피분이 주저하자 일본은 남부로 쳐들어왔다. 동맹 체결의 셋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세등등한 일본에 승산이 없다고 절감한 피분은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일본은 승리했으나 141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치렀다. 태국군도 180명이 죽었지만 당시 일본을 상대로 이 정도의 손실 비율을 기록한 군대는 거의 없었다.


태국군의 미얀마 침공에 분노한 영국이 방콕을 공습한 직후인 1942년 1월 25일, 태국은 2차 세계대전에 공식적으로 뛰어들었다. 영국과 미국을 상태로 선전포고한 것. 막상 미국은 태국을 전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세니 워싱턴 주재 태국 대사가 ‘선전포고문’ 전달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절차상의 문제’로 태국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피분 총리의 정치적 동료였던 쁘리디 파놈용이 반일 운동을 펼쳤다. 외무장관직을 사임하고 국왕 섭정부로 옮긴 그는 자유 태국 운동을 이끌었다.

겉으로는 일본의 앞잡이 국가였으나 실제로는 총리의 친일과 쁘리디의 국내 저항, 세니의 해외 반일 투쟁으로 갈려 있었다. 주목할 대목은 피분 총리가 두 사람을 묵인했다는 점. 피분 자신도 일본의 패배가 분명하다고 판단한 1943년 형식상으로나마 총리직을 내놓았다. 종전 후 태국은 점령한 영토를 재빨리 뱉고 전쟁배상금으로 쌀을 내놓아 최소한의 처벌을 받았다. 전범국으로 찍히지도 않았다.

태국의 변신은 한국과도 관련이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동맹이었다는 오명을 씻기 위해 태국은 미국에 더욱 기대고 한국전쟁에도 군대를 빨리 보냈다. 독일 쪽에 섰던 터키의 한국전 참전 경위와 비슷하다. 일본과 공수동맹을 주도한 피분 총리는 짧은 옥살이 뒤 무죄로 출옥, 8차 내각까지 이끌었다. 태국은 어느 편이냐고 물었을 때 피분은 이렇게 답했다. ‘친일도, 친영도, 친미도 아니다. 친태국일 뿐이다. 이 전쟁에서 지는 쪽이 우리의 적이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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