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6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박희태 의원이 올랐다. 15대 총선 직후 여소야대 국면에서 여당의 의원 빼가기와 관련해 여당과 야당(새정치국민회의) 의원들이 의사 진행 발언에서 설전을 주고받는 상황이었다. 박 의원은 연설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가 바람을 피우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이날 여야 의원 20여 명이 공방을 펼쳤는데 다음 날 대다수 언론에는 박 의원의 말이 제목으로 뽑혔다.
이후 ‘~로맨스 ~스캔들’은 정치인 등의 이중잣대를 꼬집는 관용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내가 땅을 사면 투자, 남이 사면 투기’ ‘내가 하면 예술, 남이 하면 외설’ 등 다양한 버전으로 유행했다. 정치권에서는 박 의원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지만 이전부터 소설·잡지에 비슷한 표현들이 등장했다. 작가 이문열이 198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구로 아리랑’에는 ‘하기사 지가 하믄 로맨스고 남이 하믄 스캔달이라 카기도 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월간지 ‘기독교사상’은 1984년 ‘요즘 학생들 사이에 내가 하는 연애는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달이라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고 소개했다. ‘내로남불’이라는 줄임말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정부 시절이다. 2015년 7월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서 전병헌 전 의원이 “누리꾼들이 만든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수 9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가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뜻으로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다. 올해 자기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현상이 만연했던 세태가 반영됐다. 아시타비는 ‘우리는 깨끗하고 정당하다’는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전 정부 탓, 야당 탓만 하는 정부·여당에 대한 질책으로 들린다. 새해에는 네 편 내 편 갈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협력·소통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고 싶다.
/임석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