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사과의 품격

송영규 여론독자부장
오바마·이재용의 진솔한 사과문
피해자·가해자·대책 분명히 제시
진정성 찾기 힘든 文대통령 사과
두동강난 사회 봉합할 수 있을까


“저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생각이 없습니다. 대신 이번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고 실수를 바로잡아 더욱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최종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저는 국가와 국민을 보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곧 제 책임입니다.”

지난 2010년 1월 7일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노스웨스트항공 253편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의 조사 결과를 설명하며 이같이 사과했다. 오후 4시 34분부터 13분간 이뤄진 연설은 사건의 원인과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과 협력 방안,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사고를 예방하지 못한 데 대한 사과로 가득 채워졌다.

2015년 6월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자들과 카메라 앞에 섰다. 당시 우리나라를 전염병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 삼성서울병원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염병 확산의 진원지가 된 데 대해 머리를 숙이기 위함이었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로 시작하는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문은 사과의 주체를 국민과 피해자로 명확히 함은 물론 이건희 회장을 간호하는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해 피해자들과 공감을 표현하고 구체적인 지원책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사과의 정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과할 때는 지켜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야 한다. 누가 어떤 잘못을 해 무슨 피해가 발생했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진정성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피해자는 국민이며 가해자는 이를 막지 못한 정부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도, 이 부회장이 삼성서울병원에 잘못이 있음을 적시한 것도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즉각적인 행동 조치와 예방 조치들도 필요하다. 사건 발생의 인과관계를 투명하게 밝히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가시적인 대책들이 있어야 한다. 이 부회장이 음압병실 확대, 치료제 개발 등을 강조하고 오바마가 항공기 탑승 전 검사를 강화하는 내용의 보안 조치를 발표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직 2개월 징계에 불복해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이 인용하면서 직무에 복귀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했다. “결과적으로 국민들께 불편과 혼란을 초래하게 된 것에 대해, 인사권자로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어 “법원의 판단에 유념해 검찰도 공정하고 절제된 검찰권 행사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특히 범죄 정보 외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거나 사찰한다는 논란이 더 이상 일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무리 읽어도 대통령이 왜 사과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불편과 혼란’을 제기한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피해자는 국민임이 분명한데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법무부 징계위원회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인지, 그에 저항한 윤 총장이 문제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행동 조치나 사후 개선 대책은 더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검찰에 대해 ‘성찰하라’는 것과 검찰 개혁에 대한 강조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두 동강 난 이유가 무엇이고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은 검찰 너희가 알아서 잘하라’는 식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혹시 대통령도 자신을 ‘피해자’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50년 전 폴란드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게토 기념비’ 앞에서 이뤄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사과를 보고 세계가 격한 감동을 표현한 것은 겨울비를 맞으며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두 손 모아 고개 숙인 그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궁금하다. 브란트 총리가 살아서 문 대통령의 사과를 들었다면 진정성을 느꼈을까. 과연 우리나라가 앞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할까./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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