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코로나 사태가 모든 걸 압도한 2020년이었다. 정치의 실종이 코로나 위기를 증폭시켰다. 치명적인 감염병으로 민생이 무너져가도 통합적 정치 리더십은 요원하다. 정치의 부재가 ‘위험 사회 한국’을 더 위태롭게 만든다. 하지만 비상한 재앙과 싸우려면 통합의 리더십과 시민 의식이 필수다. 실제로 의과학(醫科學) 영역에서 인류는 코로나 백신을 1년도 안 돼 생산해냈다. 코로나 극복의 원년으로 승화할 가능성이 큰 새해가 열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87년 체제를 통틀어 최강의 정치적 자원을 갖고 출범했다. 권력 누수 없는 유일한 정권이 될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윤석열 사태가 증명하듯 지금은 문 정권의 최대 위기다. 집권 5년 차를 앞둔 정권의 지지율이 치명적으로 균열되고 있다. 20년 집권을 호언할 정도로 막강했던 ‘청와대 정부’가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제왕적 권력이 남용한 적대 정치가 민심 이탈과 권력의 위기를 자초했다.
문 정권은 적과 동지를 나누어 적을 궤멸시키려는 적대 정치로 일관해왔다. 적폐 청산을 국정의 최대 과제로 삼은 지난 4년간의 행보가 문 정권의 적대 정치를 증명한다. 스스로 정의를 자임하면서 비판 세력을 적폐 집단으로 낙인찍어 박멸하려 했다. 윤석열 사태와 조국 사태야말로 그 생생한 증거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직무 복귀시킨 법원의 결정 이후에도 정부 여당이 사태를 확산시키는 것은 적(敵)과 동지의 투쟁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구사하는 적대 정치는 우리 편은 늘리고 적은 고립시켜 결정적 승리를 노리는 전쟁 정치다. 한국 사회를 진영 대립의 수렁에 빠뜨린 적대 정치는 코로나와의 싸움조차 극단적 진영 갈등에 매몰시켰다.
적대 정치의 밑바탕에는 파시즘의 악령이 자리한다. 파시즘은 권력을 경배하는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가 받쳐주는 대중 독재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디지털 독재로 타락해 포퓰리즘의 대중 독재를 강화하는 현상은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한다. 제왕적 권력이 삼권분립을 무력화하고 사회 세력들을 식민화할 때 민주공화정은 무너진다. 촛불을 계승했다는 문 정권에서 대한민국 헌정 체제가 최대 위기에 직면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는 자유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와 언론·출판·집회·결사·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 시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삼권분립과 법치주의를 제도화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민주 정당들은 정책 경쟁을 통해 민심을 수렴하고 각종 선거로 사회 갈등을 조율한다. 민주다원사회의 다양한 정당들은 타도해야 할 적(敵)이기는커녕 민주적 규범을 공유하는 정치적 경쟁자들이다. 정치적 경쟁자를 적으로 탄압하는 적대 정치는 파시즘으로 가는 초대장이다.
문 정권의 적대 정치는 윤석열 사태와 조국 사태를 국가 전체의 위기로 키웠다. 코로나 재앙의 한가운데서 시민들의 상호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정치권력이 만든 증오와 적대를 단호히 거부하는 존재가 성숙한 민주 시민이다. 문재인 정부는 적대 정치를 폐기하고 생활 정치를 구현해 국민의 고통과 불안을 덜어주어야 한다. 민심의 절규에 응답하는 책임 정치에 충실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당정청 일신(一新)을 통한 거국 통합 내각과 과감한 정책 전환으로 사회적 공존의 물꼬를 터야 한다. 통합과 화해의 정치 없이는 문 정권의 앞날도 없고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
옛것은 사라졌지만 새것은 오지 않았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립이 낳은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 관계는 종언을 고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효(時效)가 끝난 역사의 공간에 정치적 에너지가 약동한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딛고 도약할 공화(共和)의 시대정신을 열망한다. 재난(disaster)은 별(aster)이 없는(dis) 상태를 가리킨다. 코로나의 재난을 뚫고 나가는 공화정의 꿈이야말로 밤하늘의 별과 같다. 회복 탄력성이 강한 정치 공동체는 최악의 환난과 사회경제적 재앙조차 역사적 상승의 기회로 바꾼다. 한국 현대사는 미증유의 도전에 응전해온 성취의 역사다. 우린 오늘의 절망을 미래의 희망으로 바꿀 공화 정치의 주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자유 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