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비핵화 쏙 빼고 '남북협력'만 강조…野 "현실 직시하라"

■文대통령 신년사-외교·안보
김정은 '核 증강'으로 압박하는데
文 "한반도 평화 대화로" 되풀이
'공동 방역·보건' 먼저 제안하기도
"北 핵개발 방조 하겠다는 것인가"
야당·외교전문가들 비판 이어져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11일 신년사에서는 ‘전술핵 카드’를 공개적으로 꺼내 든 북한을 향해 비핵화를 촉구하는 발언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 기술 고도화를 천명했으나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 동력은 대화와 상생 협력”이라고 재차 말했다. 남북 협력의 불씨를 살려 북미 대화를 다시 중재해보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외교 전문가들과 야권에서는 “북한 핵 개발을 방조하겠다는 것이냐”는 지적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발표한 ‘2021년 신년사’에서 외교 분야와 관련해 △남북 협력 재개와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개선 등의 방향을 제시했다. 취임 초의 신년사보다는 남북 관계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줄었으나 대화 재개를 향한 의지는 더욱 강해진 것으로 분석됐다. 문 대통령은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맞아 ‘한미 동맹 강화’ 의지를 밝히고 냉각기가 이어지는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 발전’을 강조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 개선을 강조한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핵 무력 증강 계획을 직전에 밝힌 북한의 행보와 대조를 보였다. 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를 더욱 고도화하겠다고 천명한 가운데 문 대통령의 발언은 “전쟁과 핵무기 없는 평화의 한반도”라는 원론적 수준에 머물렀다. 북한을 향한 비핵화 촉구가 빠진 셈이다. 노동당 8차 대회 닷새째인 지난 9일 공개된 발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핵 잠수함’ ‘국가 핵 무력 건설 대업’ 등 ‘핵’이 포함된 표현을 서른여섯 번이나 사용하며 핵 증강을 외쳤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하기 위해 연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이날 비대면 형식의 소통을 처음으로 제안하면서까지 남북 정상 간 관계 회복을 향한 변함없는 의지를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고 비대면의 방식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북한이 국경을 폐쇄한 상황을 감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 테이블을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아울러 방역을 고리로 한 남북 협력 카드도 다시 내밀었다.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북한과도 보건 분야의 공동 협력을 바란다”며 손을 내민 후 이어온 기조가 유지된 것이다.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는 ‘동북아 방역·보건 협력체’와 ‘한·아세안 포괄적 보건의료 협력’을 꼽았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깜짝 북미 대화를 성사시킨 도널드 트럼프 식의 톱다운 의사결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 속에서 우리 측이 주도하는 보건 협력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 측의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앞으로도 매우 희박해 보인다. 김 위원장은 8차 노동당 대회에서 우리 정부의 방역 협력안을 이미 평가절하한 바 있다. 그는 “남조선 당국은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 관광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 들고 북남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중단된 남북미 대화를 재개하겠다는 의지도 밝혔으나 당장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되는 오는 3월이 남북미 관계에 중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 관계가 2018년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회귀했다고 규정한 북한은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트럼프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미국 측에 요구할 경우 바이든 정부와는 마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야당은 문 대통령의 안보 인식이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형두 국민의힘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정은이 ‘판문점 선언 발표 이전으로 돌아갔다’는데 문 대통령은 고장 난 시계처럼 ‘상호 간 안전 보장’ ‘공동 번영’만 반복했다”며 “(북한이) 핵 주먹을 쥐고 휘두르는데 어떻게 악수를 하고, 어떻게 대화가 되나”라고 반문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당 비대위 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핵 잠수함을 건조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명중률 고도화 이야기를 했다”며 문 대통령을 향해 “북한 현실을 더 직시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문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달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며 일본 측이 반발하는 등 최근 한일 간 첨예한 대립을 감안해 원론적 수준의 언급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섣불리 언급하기가 지금은 묘한 상황이 됐다”면서 “관계 개선에 대한 한국 정부의 뚜렷한 입장을 발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세민·김혜린기자 sem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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