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05㎝의 초대형 캔버스를 홀로 꽉 채운 초상화의 주인공은 '무서운 십대'다. 어린 여성은 연약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흰 셔츠에 검은색 니삭스를 무릎까지 올려 신은 교복 차림의 여학생의 모습에는 규범을 지키면서도 그 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고민이 역력하다. 강렬한 눈빛이 이를 말해준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세상을 다 담을 듯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화가 샹탈 조페(52)의 국내 첫 개인전이 종로구 율곡로3길 리만머핀갤러리 서울에서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조페는 섬세한 표현력으로 그려낸 작은 크기의 포르노그래피 회화로 1990년대에 이름을 알렸다. 작가는 누드 모델을 그리고자 했기에 포르노 모델을 눈 여겨 보게 됐다. 화제성은 덤이었다. "투명하고 선명한 색, 빛과 그림자 사이의 깨끗한 선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의도적으로 표현력을 억제했고, 이는 거친 주제 위에서 더욱 빛났다.
인물화는 미술사에서도 가장 오래된 장르 중 하나다. 신화나 종교적 주제, 혹은 후세에 남길 교훈적인 내용이나 업적 있는 인물의 숭고함을 기리기 위해 그려졌다. 즉, 흔하고 평범한 사람이 초상화로 남겨질 일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근대기에 이르러 초상화의 전통이 뒤집어졌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같은 누드 인물화는 거리의 여인을 주인공으로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인체를 드러내면서 관람객을 응시하는 매서운 눈빛을 그렸기에 출품 당시 혹평을 받았음에도 지금은 걸작으로 칭송된다.
누구나 만나지만 개인성(개성)을 갖지 않는 인물을 주로 그리는 조페는 그림을 통해 무엇이 숭고한 주제를 만드는 지에 대해 질문하는 동시에 페미니즘 예술에 대한 고정된 시각도 흔든다. 드러내기 꺼리는 포르노 모델, 화려하게 주목 받는 패션 모델 등을 그리던 작가는 2004년에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맞는다. 딸 에스메(Esme)의 출산이었다. 이후 작가는 커가는 딸의 모습을 그렸고 딸의 친구나 조카 등 그 또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작품들을 모은 이번 전시의 제목은 '십대들(Teenagers)'. 리만머핀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크기와 피할 수 없는 눈빛으로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속 주인공은 딸보다 조금 어린 14세의 조카 알바(Alva)다. 우리 나이로는 중학교 2학년. 무릎 꿇고 바라보듯 약간 아래에서 인물을 위로 올려다본 구도로 그렸기에, 보통의 눈높이에 그림을 걸더라도 위인의 동상처럼 고개 들어 올려보는 듯한 착시를 준다. 이는 인물에 대한 경외감을 형성하는 효과가 있으며, 거대한 작품 크기는 훌쩍 커버린 아이의 성장세를 보여주기 적합하다.
1층 전시장 안쪽에 걸린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작가의 딸 '에스메'다. 고운 초록색 눈동자가 반항적으로 쏘아본다. 무심한 눈빛이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인다. 2층에는 작은 소품들이 걸렸는데, 크기가 작아도 감각적 붓질과 강렬한 색감 등 작가 특유의 기량이 고스란히 담겼다. 10대 소녀들 틈에서 딸과 동갑인 '프레이저' 만이 유일한 남성 주인공이다. 덜 성숙한 소년이 남자가 되어가는 중성적 느낌이 성적 구별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되짚게 한다. 딸 에스메는 요즘 들어 부쩍 "그만 그려, 엄마" 소리를 자주 한다고 한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