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남아 있는 카사 디 산 조르조 은행의 모습.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하며 15세기 제노바의 위기 극복을 이끌었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저마다 근대 금융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나라들이다. 근대 금융의 기준은 대규모 자본조달의 방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정 수요가 큰 궁궐이나 대규모 토목공사,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렸으나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에서 새로운 조달 방법이 자리 잡았다. 공채(public bond)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채권은 세금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세금은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기에 국민적 동의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채권은 국가 혹은 군주가 빌리는 형식이어서 조달이 쉬웠다. 시민들은 이자 수익은 물론 경우에 따라 면세 혜택까지 가능한 공채 매입에 지갑을 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채 기록은 제노바의 몫. 1214년 1월 22일 연리 7%에 공채증권을 발행했다는 회계장부가 남아 있다. 제노바는 라이벌 베네치아와 지중해의 패권과 동방무역 독점권을 놓고 약 130년 동안 혈전을 벌이면서 공채 발행으로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금융제도를 가다듬었다.
베네치아와 프랑스에 거듭 패배하면서 막대한 채무에 봉착하자 오래 묵은 채권을 통합하고 채권자들은 협회를 만들었다. 오늘날 중앙은행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카사 디 산 조르조(1407년)가 이렇게 탄생했다. 카사 디 산 조르조는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역사(1532년)’에서 극찬할 만큼 성공을 거뒀다. 신용장까지 발행했던 이 은행은 오스만튀르크의 발흥으로 동방무역이 줄어들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며 내리막을 걸었다.
바통은 네덜란드가 이어받았다. 스페인과 80년 독립전쟁을 치르면서도 해외 상관을 연이어 개설한 저력에는 금융이 있다. 카사 디 산 조르조를 모방한 암스테르담 은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금조달과 배분의 효용성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열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년)’ 후반부는 네덜란드 금융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네덜란드 금융은 영국에서 꽃피웠다. 명예혁명(1688년)과 함께 네덜란드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금융도 바다를 건넌 덕분이다.
‘부자에게 도덕을 강요하지 말라’는 내용의 풍자시 ‘꿀벌의 우화(1705년)’를 쓴 의사 겸 작가 버나드 맨더빌도 네덜란드 출신이다. 비교우위론에 근거한 자유무역을 주창한 데이비드 리카도 역시 명예혁명기에 암스테르담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이다. 최종 주자 격인 영국은 같은 채권이라도 발행 주체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군주(sovereign)가 아니라 공공(public)이 주체여야 근대 금융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 효시는 어느 나라일까.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