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인근의 ‘소영웅’ 초판(1938)/화봉문고 소장
어린아이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밝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으로 족하다.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정말 그런가.
어느새 어른이 되고 자식을 키우다 보면 그런 생각일랑 싹 가시게 마련이다. 새해 첫새벽 해맞이를 하면서 한가위 보름달 우러러보며 반듯하게만 자라달라고 빌고 또 빈 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고백을 곁들이자면 그러면서도 내 아들딸이 공부 잘하기를, 좋은 대학 들어가기를 마음 한구석에서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다. 어느 부모인들 안 그렇겠는가마는.
이런 소년이라면 어떤가. 하루라도 회초리 면할 날 없는 천하의 개구쟁이에다 타고난 말썽꾼. 담배 피우는 떠돌이 불량소년의 단짝 친구. 그저 못된 해적이 되고 싶어 뗏목 타고 가출했다 지루해져서 자기 장례식 날 돌아왔다가 한밤중 공동묘지에서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여자 친구 꾀어서 동굴 탐험하다 갇히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모험에 뛰어든 고아. 다행히 끝은 좋다. 드디어 보물을 찾았으니까.
톰 소여(1876)
악당이 되고 싶은 악동 ‘톰 소여’의 모험이다. 어린 시절의 꿈과 낭만으로 가득한 멋진 이야기일까. 실상 톰 소여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숱한 어른들과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져야만 한다. 톰 소여가 맞서는 상대는 기성세대의 위선이며, 예의와 교양으로 치장된 허위의식이기 때문이다. 톰 소여가 감옥 같은 학교의 규율과 훈육, 문명과 근대의 속박을 이겨낸다면 어른들이 곤란해진다. 길들이지 않은 악동은 현대 사회를 망쳐놓을 것이다.
허클베리 핀(1884)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한술 더 떠 술주정뱅이 아들이자 학교 밖 소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렸다. 부모나 교사의 눈으로는 감시와 교정, 배척과 추방의 대상일 뿐인 부랑아다. 그러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노예 짐과 진심 어린 우정을 맺는 허클베리 핀이야말로 아름답고 순진한 영혼의 초상이며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이 노예제와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천방지축 악동이 벌이는 질색할 만한 한바탕 소동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금강산 자락 두메산골에 사는 막동이도 만만찮다. 이모 대신 할머니 손에 자라고 누이동생 이쁜이가 있을 뿐 영락없는 톰 소여다. 허클베리 핀 대신 떠돌이 유돌이와 어울려 다닌다. 두메산골에도 회초리를 휘두르는 대머리 선생님이 있다. 보물에 눈먼 살인범도 있고 흥미진진한 금강산 동굴 속 모험도 기다리고 있다.
40대 초반의 방인근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식민지 조선으로 데려온 작가는 방인근이다. 방인근은 탁월한 문예지 편집자이자 대중 소설 작가였다. 훗날 탐정소설과 삼류 애정 소설로 악명을 떨친 문단의 탕아다. 마치 막동이와 유돌이처럼. 열세 살 장난꾸러기들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방인근은 톰 소여의 좌충우돌 모험담을 ‘소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옮겼다. 모범 소년이나 우등생이 아니라 악동이 주인공으로 나서기는 한국 문학사에서 막동이가 단연 최초다. 그런데 방인근은 톰 소여의 소년 시대를 다시 썼을 뿐 아니라 막동이만의 뒷이야기를 이어 썼다.
‘소영웅’의 마지막 장면을 담은 권우택의 삽화
금강산의 추억을 뒤로하고 장전항을 떠난 막동이는 원산을 거쳐 서울에 입성한다. 마음 잡고 공부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늙은 할머니는 뜻밖에도 유돌이가 남아 돌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합격한 고학생의 분투기가 펼쳐지고 어느새 막동이는 세상에 다시 없이 품행 방정한 모범생이자 최우등생으로 변신한다. 막동이가 선택한 길은 어른 세계의 질서, 자수성가와 입신출세다. 막동이는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조롱하고 야유한 바로 그 땅,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렇게 식민지 악동은 영웅으로 재탄생했다. 아뿔싸, 우리의 막동이는 톰 소여보다 일찍 철들고 훨씬 잘 길들여진 셈이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은 과연 훌륭한 어른으로 자랐을까. 막동이의 화려한 성공담은 왜 씁쓸할까. 그 아이들의 미래를 궁금하게 여기는 우리는 어쩌면 교사의 눈초리, 부모의 목소리로 지금의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내고 있기 십상이다. 문학조차,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악동을 따뜻하게 품지 못한다면 대체 그 많던 악동들은 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박진영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