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 세계무역기구(WTO) 본부 전경. /연합뉴스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때마다 활용한 조항을 놓고 벌인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에서 한국이 완승을 거뒀다. 해당 조항의 위법성이 국제 무대에서 확인된 만큼 관세 폭탄을 던지던 미국의 행태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2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WTO 패널(1심)은 미국이 ‘불리한 가용정보(AFA)’를 적용해 한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한 8건의 조치가 불합리하다고 결정했다. 패널은 40개의 쟁점 중 37개의 쟁점에서 한국의 주장을 인용하며 미국의 조치가 WTO 협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AFA는 수출 업체가 제출한 자료가 부실하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 덤핑 조사 당국이 업체에 불리한 자료를 활용해 자의적으로 관세율을 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항이다. 정부는 미국이 AFA 조항을 남용하고 있다며 지난 2018년 WTO 제소를 단행한 바 있다. 제소 당시 정부는 미국이 AFA를 적용해 고율의 관세를 매긴 철강재·변압기 등 8개 품목을 문제 사례로 들었는데 해당 품목의 연간 수출 규모는 16억 달러로 추산된다. 지금껏 한국이 관여한 WTO 분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WTO는 AFA 조항 자체가 위법한 것은 아니라면서도 미국 조사 당국이 조항을 적용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덤핑 조사 당국이 수출 업체가 제출한 이외의 자료를 활용해 관세율을 산정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이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절차를 미국이 건너뛰었다는 것이다. 조사 당국이 대체 자료를 찾기에 앞서 수출 업체에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충분히 설명해야 하고 제출된 자료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당국이 큰 부담 없이 검증할 수 있는 자료는 원칙적으로 사용해야 함에도 미국 측이 이를 무시했다고 WTO는 봤다.
정부는 이번 판결 이후 미국이 관세율을 자의적으로 책정하는 경우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제 중재기구에서 미국이 AFA 조항을 남용하고 있다고 못 박은 만큼 조사 당국 입장에서는 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3년 전 WTO에 제소를 결정한 후 60%를 웃돌던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율이 한 자릿수대까지 떨어진 것도 미국이 WTO 판결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WTO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라 미국의 행태를 강제로 교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미국 입장에서는 국제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셈이라 앞으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AFA가 철강 제품뿐 아니라 한국의 수출 제품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조항인 만큼 이번 승소의 의미는 크다. 특히 미국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리지 않고 개별 품목에 대한 관세율을 높이는 식으로 보호무역 기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관세 폭탄의 무기로 활용되던 AFA의 남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평가다. 실제 AFA의 법적 기반이 된 무역특혜연장법(TPEA·Trade Preferences Extension Act of 2015)은 버락 오바마 정부 당시 도입됐으며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관세율 인상을 통한 보호무역 정책을 당분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으로 수출하는 국내 업체의 마진율은 통상 5% 안팎”이라면서 “미국이 그간 마진율을 크게 웃도는 관세를 부과해 수출을 포기하는 업체까지 있었는데 이번 판결로 부담을 한 시름 덜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승리의 배경에는 통상 관료들의 치밀한 법적 근거 준비와 꼼꼼한 변론이 뒷받침됐다. 특히 정하늘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은 이번 분쟁에서 승리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정 과장은 2019년 4월 한국의 일본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를 둘러싼 한일 간 무역 분쟁에서 예상을 깨고 우리 측의 WTO 승소를 끌어내는 데 기여해 주목받은 바 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정하늘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