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화가 석철주(71)는 동양화가지만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화면 전체를 검은 물감으로 뒤덮은 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한국적 아름다움이 어디 ‘여백의 미(美)’ 뿐이겠는가. 물 묻힌 붓으로 색 얹혀진 자리를 지워가면 역설적이게도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지 위에 수묵으로 연마했던 전통 한국화의 붓질과 필선에 혼을 담아, 바탕이 마르기 전에 긴박하게 그려낸다. 이 그림을 현대적 한국화라 부르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화가는 풀 돋고 들꽃 피어오른 작품에 ‘자연의 기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흑백의 어울림이 강렬하면서도 오묘한 석철주의 작품들이 층고 10m의 벽면을 채웠다. 강남구 역삼동의 아트웨이브가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하면서 이름을 바꾼 ‘갤러리 구조’다. 고전의 전통을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 재해석하고 그 명맥을 이어온 거장 3인과 함께하는 ‘맥(脈)-혼과 물질 그리고 소리’를 이전 개관전으로 열고 있다. 화가 석철주, 도예가 권대섭, 음악가 임동창이 40여 점의 작품과 함께 참여했다.
검은 빛 그림 앞에 놓인 달항아리는 마치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처럼 푸근하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RM이 전시장에서 보고는 ‘아, 이게 정말 한국이구나’라고 했다는 바로 그 도예가 권대섭(69)의 달항아리다. 권 작가는 조선백자의 전통성을 이어받은 후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만들어 도예를 순수미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작품들은 백자의 본질이 흙·불·물·공기를 시간과 버무려 빚어내는 과정에 있음을 덤덤하게 드러낸다. 그의 도자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아 외국 경매에서 7,7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작품들을 가로지르며 은은한 피아노 곡이 흐른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임동창(65)은 석철주의 ‘자연의 기억’과 권대섭의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4개의 피아노 곡을 작곡했다. 서양 악기인 피아노 선율에서 국악의 아련한 정서가 느껴진다. 음악이 그림과 백자 사이의 여백을 채움으로써 비로소 전시가 완성됐다.
전시는 3개 층 4개 전시실로 나뉜다. 석 화백이 화사한 색감으로 그린 ‘신(新)몽유도원도’는 권 도예가가 늘씬하고 키가 크게 빚은 ‘입호’와 함께 어우러졌다. 임동창의 라이브 연주 영상을 볼 수 있는 방석 감상실, 오디오기업 오드(ode)와 협업한 음악 감상 공간 등이 마련돼 잠시 동안의 명상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갤러리 구조 측은 “우리 고전을 동시대적으로 풀어낸 거장들을 소개하며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1일까지.
한편 ‘힙스터들의 성지’로 불리는 성수동은 갤러리구조를 비롯해 우란문화재단과 더페이지갤러리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한남동에 있던 대림미술관의 디뮤지엄이 서울숲 부근으로 이전을 앞두고 있어 예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