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 경영진의 70% 이상이 인간보다 인공지능(AI)의 재무관리를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진의 절반 이상은 앞으로 5년 내 AI가 기업 재무팀, 자산상담사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기업의 기존 재무 전문가가 재무관리 실무보다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등 소통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라클이 14개 국가의 기업 경영진 2,700명(최고경영진과 이사급 1,6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6일 발표한 ‘돈과 기계(money and machines)’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인의 77%가 ‘자사 재무팀보다 AI를 더 신뢰한다’고 답했다. 특히 89%가 ‘AI가 재무에 기여할 수 있다’고 답해 AI에 거는 기대가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87%는 ‘재무를 AI 기반으로 재편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업 경영진은 AI의 발전이 재무·자산관리 인력 구조도 재편할 것으로 내다봤다. 10명 중 9명에 달하는 90%가 ‘AI가 재무·자산 전문가를 대체할 수 있다’고 평가했고 56%는 향후 5년 내 AI가 전문가를 대체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조사에 참가한 기업의 51%는 이미 재무관리에 AI를 활용하고 있었다. 재무 분야에서 AI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으로는 85%가 재무 승인, 예산 수립 및 예측, 보고, 위험 관리 등 정확성과 신속성을 요구하는 업무를 꼽았다. 아울러 인간 재무 전문가에게 필요한 능력으로는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40%), 할인 협상(37%), 거래 승인(31%) 등이 제시됐다.
위르겐 린드너 오라클 클라우드비즈니스사업부 수석부사장은 “코로나19로 불거진 불확실성 때문에 가정과 기업 조직 재무관리의 디지털·AI화가 가속화됐다"며 “궁극적으로 기업 및 개인 재무 전문가의 역할이 재정의되는 만큼 기업은 AI 활용 역량을 갖춘 금융 인재 확보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은 지난 2019년부터 전국 수만 개 통신 장비의 임차료·전기료 등 10만 건이 넘는 납부 데이터를 인공지능(AI) 자동화 솔루션이 처리한다. 고객상담센터 데이터를 분석해 직원들의 생일 등 기념일을 축하하거나 선물을 보내는 역할도 맡는다. 과거에는 직원들이 직접 했던 일이다. SK텔레콤 직원들이 단순 반복 노동에서 해방된 것은 AI 기반 자동화 솔루션 ‘콥봇’ 덕분이다. SK텔레콤은 직원들이 근무시간 중 30%를 e메일 확인, 자료 다운로드 등 정형적이고 반복적인 업무에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콥봇을 개발해 도입했다. 데이터 추출이나 분석, 회계·재무·대량 문서 처리 등 반복 업무는 콥봇에 맡기고 직원들은 기획안·제안서를 만들거나 통계 자료를 분석하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최근 단순 반복 업무는 물론 재무·회계·인사·법무 등 다양한 지원 부서에도 빠르게 AI를 도입하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LG전자는 AI 기술을 활용해 거래 채권의 부도 위험을 사전에 알려주는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해 2018년 초부터 활용하고 있다. 채권의 부도 사례를 분석해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 부도 위험을 사전에 감지하고 관리하고 있다. 실제 이 시스템은 2018년 도입 당시 부도가 난 채권 가운데 65%를 사전에 예측했다는 게 LG전자의 설명이다.
자산 운용사들도 자산 운용에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접목하고 있다. IBK자산운용이 미국 금융 AI 기업인 켄쇼와 협업해 2018년 출시한 ‘IBK 켄쇼 4.0 레볼루션 펀드’는 올해에만 약 1,600억 원을 동원했다. 덕분에 지난 해 말 400억~500억 원 수준이었던 수탁액이 최근 2,000억 원대까지 불어났다. 최근 액티브 공모펀드에서 자금 유출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흥행이다. 이 펀드는 미국 증시에 상장한 전 세계 기업 중 4차 산업혁명 기여도가 높은 기업 130여 곳에 분산 투자한다. 투자 종목 선정에는 켄쇼의 AI 알고리즘이 들어간다. IBK자산운용 관계자는 “AI를 활용하면 인간 리서치, 펀드매니저만 있을 때보다 양적으로 훨씬 많은 종목과 변수를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오픈 AI가 지난해 6월 내놓은 3세대 언어 예측 모델인 GPT-3(AI를 이용해 텍스트 형태로 정보를 변환해주는 모델)가 대중화하면서 AI가 대체하는 업무가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재무제표는 물론 회의록·코딩 작성까지 AI가 처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현재 이 기술을 독점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경우 B2B 솔루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인사 분야에서도 AI가 활약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7월 ‘AI 알고리즘 기반 인사 시스템’을 활용해 영업점 직원 인사 이동을 실시했다. 올해 초에는 점포장급 배치, 지역 간 이동까지 활용 폭을 넓혔다. AI 알고리즘 기반 인사 시스템은 직원의 업무 경력, 근무 기간, 자격증, 출퇴근 거리 등을 고려해 최적의 근무지를 선정한다.
AI가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는 영역이 확대되면서 위기감도 생기고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인력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2017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상당수 인력이 자동화되겠지만 의료 서비스 제공자, 엔지니어, 과학자, 데이터 분석가 등 전문가는 계속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며 “늘어나는 직업군 수요가 일자리 규모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AI 전문가들도 이 같은 전망에 동의하면서 인간은 보다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장병탁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AI가 잘하는 분야에서 사람이 직접 경쟁하겠다고 나서면 결국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며 “AI를 조수로 부릴 수 있는 결정권을 지닌 고차원적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빅데이터응용학과 교수는 “재무처럼 합리성과 최적화가 중요한 분야에서 AI의 인력 대체 가능성이 큰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AI를 관리하는 인력이 필요할 것이고 AI 도입으로 기존 인력 공급이 제한돼 있던 개인 자산 관리 등 시장이 확대돼 또 다른 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madein@sedaily.com, 윤민혁 기자 beherenow@sedaily.com, 심우일 기자 vita@sedaily.com, 오지현 기자 ohj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