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 놓친 학폭 악몽...십수년 세월 뚫고 '미투 부메랑'

배구계 학폭 논란 일반인들 미투 폭로 이어져
제때 치료 안된 학폭 여생의 트라우마 남지만
'피해자 중심' 기관 여전히 부족한 학폭 시스템
심리 치료 질색하는 낡은 부모 인식도 장애물로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학폭)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이다영(이상 25)의 국가대표 자격이 무기한 박탈됐다. 사진은 지난달 26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인천 흥국생명과 서울 GS칼텍스의 경기 전 팬 투표로 올스타에 선정돼 트로피를 든 흥국생명 이재영(왼쪽)과 이다영./연합뉴스

프로 배구계에서 시작된 학교폭력 논란은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의 미투로 이어졌다. 이같은 현상에서 보듯 제때 회복되지 못한 학폭 피해는 깊은 트라우마로 남는 만큼 피해 학생들에 대한 치료 및 회복에 학교·교육청 등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부족한 피해자 맞춤형 지원과 부모들의 낡은 인식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다영·이재영 선수에 대한 폭로를 기점으로 스포츠계와 연예계로 번진 ‘학폭 미투’는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반인들의 각종 학폭 증언들로 이어졌다. 사례마다 폭력의 양상과 시기는 달랐지만 피해자들을 하나같이 시간이 흘러도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며 참담한 마음을 드러냈다.


“‘피가해자 분리’하는 피해자전담 기관 늘여야”

19일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3년 간 학교폭력대책심의위(심의위)가 피해 학생에게 내리는 치료·요양 조치는 해마다 점증하고 있다. 지난 2017년 1,763건이었던 것이 2년 뒤인 2019년에는 4,150건으로 뛰었다. 같은 기간 내려진 심리·상담 조치는 매년 2만 건 안팎을 기록했다. 중대한 학폭 사건은 교육지원청에 설치된 심의위의 심의를 거친다. 심의위는 사안에 따라 피해 학생에게 심리·상담, 치료·요양 등의 보호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뒤늦게 문제가 된 각종 학폭 사건들이 발생했던 과거에 비해 공교육의 학폭 대응 시스템이 선진화됐다는 데 이견이 없지만 피해자 맞춤형 지원 부문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해 학생들의 회복과 치료를 돕는 ‘피해자전담지원기관’은 현재 전국에 163개소가 있는데 ‘피해전담지원기관’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여기에 포함된 일부 기관들은 가해자 지원 기능 등을 겸하거나 사실상 피해자 전담이라는 명패만 내건 경우도 있다. 그렇다보니 피·가해자 분리가 어려워 피해 학생들이 가해자들을 마주칠 우려가 있고 그만큼 피해자가 회복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돼왔다. 순수하게 피해자 회복에만 집중하는 센터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된 이유다.


아울러 중장기 치료 과정을 제공하는 피해자 전담기관 역시 전국에 하나밖에 없어 각지에서 밀려드는 피해자들의 요청에 대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교육부와 이화여대 학교폭력예방연구소가 발행한 '학교폭력 사안처리 가이드북' 2020년 개정판에 따르면 가해자 특별교육기관은 지난해 5월 기준 5,189개소로 피해자 전담기관 수를 크게 웃돈다. 이 기관들이 모두 가해 학생 지원만을 위한 곳은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피해자 회복과 관련된 기관이나 프로그램의 다양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정신과 질색” 낡은 인식…골든 타임 놓치는 학생들

학폭에 대한 부모들의 해묵은 인식도 피해 학생들의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 심의위가 심리·상담 등 각종 보호조치를 내리기 앞서 피해 학생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심리 치료에 대한 거부감이나 낙인 효과가 우려된다는 등의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부모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이다. 트라우마를 지워낼 ‘골든타임’을 잃은 학생들은 학폭의 그림자 속에서 오랜 고통을 받는다. 한 교육지원청의 관계자는 “정신과 치료라고 하면 질색하거나 정신과 치료를 한 진료 코드가 남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인식을 알고 있는 당국 역시 피해 학생의 낙인을 막고자 가능한 한 관련 사실을 비공개하려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실정이다. 중장기 치료를 위해 등교를 중단하는 경우는 물론 통학과 치료를 병행하는 경우에도 치료 사실이 주위에 새나가는 게 현실이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주말에는 기관에 안가려 하는 분들이 많고 주중에는 학교에 오래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과 중에 가는 경우가 많은데 상담 교사 등이 노력하지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 치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설명했다. 박옥식 청소년폭력연구소장은 “계속해서 터지는 폭로들은 학폭 트라우마라는 게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보여줬다”며 “피해 학생들에 대한 치유가 신속하게 이뤄져야지만 응어리를 풀고 건강한 시민들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허진 기자 hj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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