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으로 벌어놓은 여유 자금이 부동산으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미술 시장으로 몰려드는 분위기입니다. 젊은 수요자의 문의가 많아요.” (미술 시장 전문가 A 씨)
“지난해만 해도 미술품 경매의 큰손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의 기관이었는데 이번에는 개인투자자의 매수 기세가 대단해서 준비하고 입찰에 참여한 기관도 밀릴 정도네요.” (공립 미술관 관계자 B 씨)
지난 23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서울옥션(063170) 강남센터에서 열린 제159회 메이저 경매. 첫 번째 출품작은 이우환의 판화 ‘무제(총 250에디션)’였다. 푸른색 큰 점 하나가 화면 아랫부분을 차지한 이우환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이 작품은 낮은 추정가 600만 원에 경매에 올라 1,850만 원에 낙찰됐다. 추정가를 크게 웃도는 낙찰 행렬의 시작이었다. 이우환은 판화·도자 등 소품 4점이 총 9,600만 원, 점·선·바람·조응 등 유화 4점이 총 14억 원에 거래돼 낙찰 총액 약 15억 원을 기록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서울옥션의 이날 낙찰 총액은 110억 원, 낙찰률은 90.4%였다. 낙찰 총액 110억 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시장이 위축되기 이전 규모로의 복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낙찰률이다. 이날 낙찰률은 국내 양대 경매 회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이 진행한 메이저 경매(자선 경매 제외) 중 최고 기록이다.
미술 시장이 강력한 회복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풍부한 유동성에도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자금이 대체 투자처이자 안전 자산으로 미술품을 주목한 결과로 분석된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여파로 해외여행이나 문화 향유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소장하며 감상할 수 있는 미술품에 대한 ‘보복적 소비’ 경향도 눈에 띈다. 최근 몇 년 새 미술 시장에 진입한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샤넬백’ 구입에만 긴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미술 경매로 향하는 발길도 분주해졌다.
이날 가장 뜨거운 갈채의 주인공은 김창열의 1977년 작 ‘물방울’이었다. 시작가 4억 8,000만 원의 그림에 경합이 붙어 10억 4,000만 원에 새 주인을 찾아갔다. 지난해 7월 수립된 작가의 경매 최고가 5억 9,000만 원을 훌쩍 뛰어넘은 새 기록이다. 이로써 김창열은 작가별 최고가 작품 순위에서 유영국·장욱진을 제치고 8위에 올랐다. 지난달 작고한 김창열의 작품은 이날 경매에만 8점이 나와 총 19억 원의 판매액을 올렸다. 박서보도 가격대가 높은 1970~1980년대 작품이 아닌 2011년 작 ‘묘법’이 3억 500만 원에 팔려 해당 시기 작품 중 최고가를 새로 썼다.
고미술을 향한 열기도 뜨거웠다. 청전 이상범의 10폭 병풍 형태의 대작 ‘귀로(445×135.2㎝)’가 시작가 1억 원으로 출발해 4억 2,000만 원에 팔렸다. 이상범 작품 중 최고가다. 종전 최고액은 2016년 3월 서울옥션에서 거래된 ‘영막모연’의 3억 4,000만 원이었다. 이 밖에도 200만 원에 나온 민화 산수도가 2,200만 원, 300만 원에 시작한 민화 화훼도가 2,300만 원에 팔렸다.
글로벌 경매 회사인 크리스티코리아의 이학준 대표는 “그림을 아는 일부 수요층이 대안 투자로서 미술품의 가능성을 보고 강한 수요를 보이고 있다”면서 “해외에도 기반을 갖고 있는 한국의 중진 이상 작가를 주목하는 경향”이라고 전했다. 이우환·박서보·정상화·윤형근·이배·김종학 등 ‘블루칩’ 작가들은 해외 전속 화랑을 두고 있어 세계시장을 다지는 중이다. 이미 유럽과 홍콩 등지에 잘 알려진 ‘물방울’ 화가 김창열도 지난해 뉴욕 티나킴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이후 해외 컬렉터들의 관심이 고조됐다. 이 대표는 “해외시장에 기반을 갖는 작가는 국내시장 변동에 출렁이지 않고 안정적으로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는 점을 고객들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밀레니얼 컬렉터들의 시장 견인 효과에 대한 기대가 높다. 손이천 케이옥션 이사는 “기존 고객들이 살 만한 작품을 이미 다 샀다는 전제하에 새 고객층이 시장 회복을 주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현장 신규 고객과 홈페이지를 통한 신규 회원 등록이 급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은애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도 “실수요에 근거한 주택 매매와 리모델링 등의 경향으로 미술품은 인테리어와 대체 투자 자산을 겸해 각광받는 중”이라며 “미술 시장에 신규 컬렉터로 등장한 20~40대가 ‘아트테크’를 선호하면서 최근에는 미술품 공동 투자 플랫폼도 성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4~5년 전 미술 시장 활황을 이끌었던 1970년대 단색조 회화를 대체해 시장을 견인할 작가가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이우환의 구작이 아닌 1990년대 말~2000년대의 ‘조응’ 시리즈, 박서보의 2000년대 이후 ‘묘법’ 시리즈가 더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