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26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해 대(對) 사우디 제재 조처를 단행했다. 그러나 정작 미 정보당국이 2018년 10월 카슈끄지 암살을 승인했다고 판단한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제재대상에서 빠졌다. 그가 실권자인데다 사우디가 중동의 동맹이라는 현실과 타협한 고육지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재무부는 사우디 정보국의 전직 부국장인 아흐메드 알아시리를 제재하고, 왕실경비대의 신속개입군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신속개입군은 왕세자 경호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카슈끄지 암살에도 개입했다는 것이 미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제재 대상이 되면 미국 내 보유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 기업과 거래가 금지된다. 미 국무부는 76명의 사우디 시민권자에 대해 비자 발급 중지 조처를 발표했다.
이 조처는 국경을 넘어 언론인이나 반체제 인사를 대상으로 억압, 괴롭힘, 감시, 위협 등 행위를 한 국가를 겨냥해 국무부가 '카슈끄지 금지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도입한 정책이다.
국무부는 반체제 인사와 언론인을 감시하거나 괴롭히고 표적으로 삼는 사우디와 다른 나라의 행동을 매년 발간하는 인권보고서에 기록하는 작업도 시작하기로 했다.
이 조처는 카슈끄지 암살의 배후에 무함마드 왕세자가 있다는 정보당국의 보고서가 이날 공개된 데 따른 후속 작업이이기도 하다.
이 보고서는 왕세자가 카슈끄지 생포나 살해를 승인했다고 판단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지만, 제재 명단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는 빠졌다. 솜방망이 제재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작년 대선 기간 카슈끄지 암살이 왕세자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면서 "그들이 대가를 치르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도높은 발언까지 했다.
카슈끄지 암살을 못 본척하며 왕세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앙꼬 빠진' 제재는 사우디와 관계, 왕세자의 위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우디는 미국과 적대적이거나 껄끄러운 나라들이 많은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대표적인 동맹국이다. 중동의 대 테러전과 이란 견제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데, 국왕의 아들을 제재할 경우 양국관계의 경색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무함마드는 2017년 왕세자에 지명된 뒤 사우디를 실제로 다스리는 실권자로 통한다. 머지않아 공식 통치자로 등극할 인물을 내치는 결정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번 보고서를 공개한 국가정보국(DNI)의 애브릴 헤인스 국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보고서가 양국관계의 진전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미 당국자는 무함마드 제재는 너무 복잡한 문제이고 사우디에서 미국의 군사적 이익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며 선택지가 절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CNN방송은 보도했다. 국무부에 왕세자 제재 옵션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없었다는 전언도 있다.
한 고위 당국자는 이번 보고서 내용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1년도 더 이전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라고까지 언급했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로선 보고서 전격 공개와 관련 인사 제재를 통해 사우디에 모종의 조처를 하고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양국 간 부정적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타협을 했다고 볼 수 있다.
CNN은 대선 후보 시절에 비해 대통령이 된 뒤 더 복잡해지는 의사결정의 유형을 보여준 것이자, 휘발성 높은 지역에서 동맹과 결별하는 일의 어려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대통령이 왕세자 직접 제재시 외교적 부담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고위 당국자의 발언을 전하면서도 인권단체와 친정인 민주당 구성원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곽윤아 기자 ori@sedaily.com